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도쿄! - 공드리의 마음, 까락스의 천재, 봉의 페티시즘

도쿄!

밤늦게 영화를 봤다. 두 편을 연달아서. 뒤에 본 <도쿄!>는 옴니버스 3부작이니까 네 편을 연달아 봤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머리가 복잡할 것 같지만, 전혀! 감기가 심하고 잠도 부족해서 하루 종일 힘들었는데, 객석에 앉은 3시간 동안은 정말, 정말 즐거웠다. 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기도 오랜만이다.

처음엔 이안 감독의 <색, 계>를 볼 생각이었다. 동네 극장에서 철 지난 영화 여러 편을 한 상영관에서 시간별로 나누어 재상영하고 있다. 그런데 늘 바쁜 처제가 모처럼 시간을 내서 놀러 왔는데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결국 <색,계>의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다들 잠자리에 든 뒤에야 늦게 영화관을 향했다.

<색, 계> 대신 고른 작품이 <미쓰 홍당무>. 하하하 즐거운 100분이 지나고 그놈의 ‘라이터’로 달궈진 가슴을 안고, 출구를 나오는 즉시 매표소로 돌아가서 <도쿄!>행 티켓을 끊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도쿄가 배경인 이 옴니버스 3부작은 무척 좋았다. 상영 중엔 몰입해서 몰랐는데, 나갈 때 보니 관객이 나 포함 세 명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금요일 밤인데! 난 정말 좋았는데, 텅 빈 객석이 안타까웠다. 크게 흥행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묻히기에도 아까운 영화다. 분명 좋아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동네방네 알리고 싶어졌다. 이 감상평을 읽고 단 한 분이라도 재미있게 보신다면 나름 보람이 있겠다.

* 스포일러는 (거의) 없음!

인테리어 디자인 - 아키라와 히로코

기교를 부리지 않는 미셸 공드리는 최고다. 도입부는 새벽녘 케이블에서 줄창 틀어대는 일본 에로물인가 하는 의심을 들었다. 일본 여배우 특유의 귀여운 말투도 귀에 거슬리고. 그런데 점점 좋아지더니, 결말은 '심장이 덜컹!'하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가 좋다 싶었던 건, 집을 구하는 두 사람이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아주 긴 테이크부터다. 딱히 이유를 대기는 힘든데, 확 끌렸다. 정서적으로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나 보다. 그 장면 이후로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진행은 다소 투박하다. 한때 천재 소리 듣던 중견 감독의 작품치고는 세련되지 못하다. 근데 그 점이 또 좋다. 매끄럽지 못한 이음새는 몰입을 방해하기는커녕 독특한 리듬감을 만든다. 의도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정말 좋다.

주인공의 변신은, 누구는 이게 뻔한 설정이라고 혹평했지만, 변신 과정의 시각적 충격은 상당하다. 이런 경우, 영화가 소설보다 우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고 내가 떠올렸을 법한 그림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원작은 공드리 감독 여자친구의 만화라고 한다.)

갈등을 해소하지 않고 그냥 끝내버리는 무책임함도 마음에 든다. 다만 다음 편이 곧바로 시작하는 통에 여운을 음미할 만한 시간이 부족했던 점이 아쉽다. 어쩌면 이 단편은 나만의 보물인지도 모른다. 내가 느낀 매력을 다른 분들과 공유할 수 있을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정말, 정말 좋다. (참고로 시네21의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에 별 하나를 주셨고, 어떤 분은 시시하다고, 다른 분은 산만하다고 평하셨다. 쳇!)

그리고 내가 발견한 굉장한 비밀. 히로코 역을 열연한 후지타니 아야코 양이 글쎄, 스티븐 시걸 형님의 딸이라네! 데이트 신청은 목숨 걸고. ^^

후지타니 아야코 양

이 아이가

스티븐 시걸 형님

내 딸이다!

<도쿄!>에 대한 여러분의 평을 찾아보니, 열에 아홉은 <똥>을 최고로 뽑았더라. 확실히 다른 두 편을 압도하는 완성도와 도발적인 상징 구조를 지녔고, 영상미 또한 탁월하다. 드니 라방의 연기, 기가 막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등으로 뽑았다.

순전히 취향의 문제지만, 난 상징이 중심을 차지하는 작품은 별로다. 영화를 보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고, 영화를 보고 나서 되새기는 즐거움이 있는데, 상징이 너무 크게 나서면 첫 번째 즐거움이 방해를 받는다. 나처럼 멀티태스킹이 어려운 사람에겐 버겁다. 나는 객석에 앉은 동안의 정서적 교감을 가장 중시하는 타입의 관객인가 보다.

완성도가 아주 높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보는 중간에 작품의 완성도를 의식하게 되면, 퍼펙트게임을 의식하는 투수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린다. <똥>이 레오 까락스 감독에 대한 기대를 확실하게 채워준 ‘멋진 복귀작’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본 것도 사실이다. 물론 깜찍한(!) 마무리 덕분에 뒷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리고 한 말씀. 드니 라방은 상상 초월이다! 설명하려고 노력할수록 비참한 기분이 드는 명연.

흔들리는 도쿄

난 봉 감독의 팬이 분명하지만, 이 작품은 실망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듯 보인다. 미셸 공드리는 우습게 보시고 까락스는 현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방심하신 걸까. 다른 두 편과 나란히 비교하면 정말 아쉽다.

확실히 초반의 그 아름다운 빛깔은 황홀하다. 남자가 똥 누는 모습까지도 아름다울 만큼. 손끝으로 외로움을 더듬는 듯한 화면은 이와이 슌지보다 달콤하다.

아오이 유우

피자와 카터벨트, 그 감독의 취향.

그런데! 아오이 유우가 등장하면서부터 왜 감독님마저 흔들리시나요! 카터벨트도 낯 간지러운데, 허벅지의 버튼이라뇨! 그냥 아오이 양에게 빨간 옷과 카터벨트를 입히고, 기절시키고, 매끄러운 피부에 그림을 그려 넣고, 한번 눌러보고 싶으셨을 뿐인 거죠?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게다가 그 피자배달 로봇은 너무 창피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 가지 위안은 다케나카 나오토 아저씨의 뜻밖의 출연. 과연 굉장한 존재감이다.

나중에 봉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어 봤는데, 히키코모리에 관한 처음 아이디어는 아주 그럴 듯했다. 그런데 결과는 버튼과 로봇과 마무리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다. 누구가의 말씀처럼 봉테일에게 30분은 너무 짧은 걸까?

추천의 변

영화평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글이지만, 이 글로 단 한 분이라도 흥미를 느껴서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다. 적어도 모두 좋아하는 <똥>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하다. 그리고 혹평 때문에 평소 좋아하던 봉 감독님한테 살짝 미안하지만, 그냥 관객 한 명의 솔직한 감상일 뿐이니, 부디 너그러이. 다음 작품 <마더>, 엄청 기대하고 있다.

공드리, 까락스, 봉

(머리 크기로) 두 거장을 압도하신 봉 감독님.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장정일의 공부 - 인문학 초심자를 위한 맛있는 이유식

소설과 비소설을 통틀어 올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2008년이 두 달 넘게 남았고, 책장에는 아껴둔 기대작이 두어 권 남아있지만, <장정일의 공부>는 ‘키노 선정 올해의 책 2008′의 가장 유력한 후보다.

흥미는 있지만 읽을 마음먹기가 힘들었던 분야의 책들을 요약, 비교, 해설, 비평한 이 친절한 ‘고농축 지식 보충제’는 재미의 질과 양 모두 마음에 쏙 든다.

공부?

예쁜 선홍색 표지가 눈길을 잡아끌었고, 제목을 보자마자 ‘공부? 무슨 공부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우선 그 대답부터 하자면, 이 책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정일 씨가 ‘넓은 의미의 현대사’를 공부하고 정리한 교양인문서다. 재미없을 것 같은 설명이지만, 무척 재미있다. 다른 인문서와 다른 부분은, 우선 서평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의 현실 사회와 밀접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과 연관한 주제의 책들을 요약하고 비평하는 메타북. 또 다른 말로 하면, 주제별로 정리한 <장정일의 독서 일기> 특별판.

인문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어본 분이라면, 저자가 무시무시한 독서광이며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머릿말에서 자신은 “무식하고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곧 “무지의 중용”으로 이어졌다며, 무책임함을 벗고 확실한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한국 사회가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이며,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서야할 위치를 찾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무지의 중용”이라도 취하면 다행이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정치적 주장 가운데 뒷받침할 만한 이론적 토대나 객관적인 사실 정보를 갖춘 것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어느 당파가 좋은 정치를 펼칠 거라고 판단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걸까?

다들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려하지만, 심지어 이 책의 저자도 차마 입에 담지 않지만, 사실 우리 정치의 후진성은 우리의 무지와 무식에 기인한다. 주권자로서 우리의 모자람은 공부를 게을리 한 우리 자신의 책임인 동시에, “대중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정치권력의 흉계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답은 공부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최소한의 (정치적) 판단력을 갖춘 건강한 사회 구성원 양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니까, 당연한 말씀.

우리는 근대성의 포로

책 읽는 재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책의 내용을 간단히, 아주 간단히 소개하자면.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주제는 ‘탈근대’다. 식민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서양 중심의 세계관, 근대화론, 신자유주의 등 만만치 않은 주제의 책들을 너무나 가볍게 잘도 읽어대면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실체에 대한 학문적 해부를 시도한다. 읽다보면, ‘대한민국’이 근대성의 폐단을 골고루 갖춘 표본 같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탈근대를 다루되 이론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런 게 많았다면 아마 난 읽다 말았을지 모른다.) 주로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과 보편적 가치에 기대어 인문학 초심자인 독자의 이해와 흥미를 솜씨 좋게 보살핀다. 이 독후감에 ‘인문학 초심자를 위한 이유식’이라는 부제를 붙인 건 결코 비하가 아니며, 오히려 나 나름의 찬사다. 아는 만큼 재미있는 것이 공부이니, 저자의 세심한 노력은 분명 바라던 대로의 반향을 얻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치즘, 극단에 선 근대성

저자는 나치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나치즘이 주제이거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부서진 손잡이를 움켜쥐고’를 비롯해 전체 23개 장 가운데 6개에 이른다. 지면의 4분의 1을 들인 나치즘 탐구는, 우리의 집단주의적 성향을 감안하면 저자의 우려가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히틀러는 줄곧 박정희에 오버랩된다. 이게 무척 재미있다. 저자는 박정희에 대한 ‘집착’을 숨기지 않으며, 우리의 히틀러가 완전히 무장 해제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기세다. (장정일 씨의 다음 저작이 박정희 분석이라 해도 난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거다.) 진보 진영에서 박정희가 절대악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저자의 이런 태도에는 어떤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을 법한 냄새가 풍긴다.

그 밖의 내용과 나의 관심사

그 밖에 민족주의의 폐해, 잘못 낀 첫 단추 이승만, 또 하나의 제국주의 시오니즘, 조선인 전범, 진보정치의 좌절, 군사문화, 반공주의의 기원, 대중독재 등등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내용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창세기, 시오니즘의 생성-발달 과정, 미 제국의 몰락 등이 아주 흥미진진했으며, 전체주의와 근대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한 사실을 새로 배웠다. 친일에 가려진 조선인 전범과 조선 인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사회의 주류, 국가에 의한 기억 날조 등도 신선한 생각거리를 많이 얻었다.

공부는 독자의 몫

저자의 주장은 선명하지만, 모든 책읽기가 그렇듯 수용할지 말지는 독자 몫이다. 이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나만해도 저자와 다른 생각이 몇 가지 있는데, 나보다 보수적인 독자라면 반감을 품을 만도 하다. 다만 나와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고급 지식이 압축된 좋은 교양서는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며, 나와 다른 주장일수록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또 저자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님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어쩌면 전공자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비판거리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목이 말하듯 저자도 같이 공부하는 입장이다. 이 책은 공부 열심히 하는 옆집 아저씨의 노트라고 보면 좋겠다. 설사 틀린 내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남의 노트는 참고만 할 뿐,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 추측하자면, 저자도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단 좋은 자극을 주고 공부를 권유하는데 더 의미를 두었을 듯싶다.

마지막으로 ‘과두정이 온다’ 장에서 인용한 한 구절을 재인용해본다.

민주주의란 더도 덜도 아닌, 책을 읽는 능력이다.

옥의 티

놀랍게도 비문을 몇 개 발견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종종 눈에 뜨여서, 처음엔 내 무식을 탓했는데, 꼼꼼이 뜯어봤더니, 비문이었다. 주어-술어 관계가 묘한 문장을 두어 개를 찾았고, 따옴표 위치가 애매해서 문장 전체의 의미를 뒤집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저자의 책임이라기 보단 랜덤하우스 편집부의 책임이 크다. 그야말로 옥의 티다.

관련 링크 – 인터뷰 “장정일 – 나는 독서광이 아니다” (북데일리)

장정일의 공부 - 8점
장정일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To Kill A Mockingbird - 열린 마음을 호소하는 따뜻한 성장소설

퓰리처상 수상작이자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인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더 어릴 적에 읽지 못한 게 참 아쉽다.

가장 큰 매력은 정겨운 소설적 경험

이야기가 풍성한 소설이다. 소설 전체의 중심은 인종 문제와 관련한 '톰 로빈슨 사건'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훨씬 이전이다. 작가는 중심 사건에만 집중하지 않고, 대공황 즈음 미국 남부 시골마을 어린 아이의 생활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이웃 아저씨에 대한 괴담, 동네에서 놀며 보낸 시간, 아버지와의 추억, 학교에서 벌어진 소소한 사건 등등. 취향에 따라선 산만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보편적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 개구쟁이 여자아이가 되어 작가가 공들여 만든 소설 속 마을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가 하퍼 리를 남자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다 읽고 보니 여자였다. 소설 내용도 자전적 경험을 바탕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돌아보니, 손에 잡힐 듯한 배경과 정말 있었을 법한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납득되었다. 물론 아무리 자전적 이야기라도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훌륭하게 활자로 재현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펼쳐 놓는 작가의 능력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모든 어른은 한때 어린 아이였다

어린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를 나란히 제시한 점도 좋았다. 교훈적인 작품은 독자의 반감을 사기 십상인데, 저자는 현명하게도 어른들 – 당대의 미국인들 – 에게 직접 훈계하는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식을 취했다. 저자의 ‘계몽적 메시지’는 문학적 가치를 거의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아이들의 두려움의 대상인 미지의 ‘부 래들리’. 흑인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과 잠재적 두려움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는 ‘톰 로빈슨’. 이 둘은 ‘우리 밖의 존재’를 상징한다. 이 ‘문제적 존재’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건 마을의 존경받는 변호사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애티커스. 이 (저자가 생각하는) 미국적 이상(理想)의 화신이 아이들에게 하는 모든 말은, 곧 메이콤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인종차별로 갈등하는 60년대 미국 사회에 전하는 저자의 간곡한 설득이다. 제발 타인과 공감(sympathy)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유달리 ‘우리’가 강한 한국인들도 우리 밖의 존재에 대단히 민감하면서도 자폐적인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 책이 증세 완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문제 제기는 흑백갈등에만 머물지 않고 왜곡된 종교적 신념, 계층 간 갈등, 식민주의, 공교육의 문제점, 이중적인 윤리관 등 ‘닫힌 사회’에 일반적인 병폐들을 망라한다. 1960년에 발표한 소설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2008년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도 뼈가 아플 정도로 유효한 비판이다. 슬프게도 인류는 20세기 후반부터 거의 진보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 에헴,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직접적인 주제 표현은 확실히 비문학적이며, 이 작품의 중대한 단점이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트루먼 카포티는 내 친구

하퍼 리가 이 소설의 진짜 저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일종의 음모론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유일한 소설이다. 데뷔작이자, 대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 외 활동은 에세이 한, 두 편 말고는 거의 없으며, 인터뷰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혀 활동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인데, 문제는 작가가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와 어릴 적부터 친구라는 거다. 이 작품 속의 ‘딜’이 바로 어린 시절의 카포티라고 한다. 집에 카포티의 단편이 실린 단편집이 있길래 문체를 대충 비교해봤는데, 뭐, 그렇다면 그런 것도 같고. 후후.

2005년과 2006년에 개봉한 <카포티 Capote>와 <인페이머스 Infamous>라는 영화에 두 작가의 관계와 이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두 편 다 지루하다는 평이 많아서, 감히 보기 두렵다. 보신 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내용을 살짝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번역본

귀에 익은 제목 ‘앵무새 죽이기’는 명백한 오역이다. mockingbird는 흉내지빠귀이고, 앵무새는 parrot다. 당연히 둘은 엄연한 다른 새이고. 흉내지빠귀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바꿨나 본데, 작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런 짓을 했다면, 이건 뭐, 거의 범죄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이런 식으로 손을 대는 건 모나리자에 수염 그려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목 말고도 예전 번역본에 문제가 많았는지, 새로 번역한 개정판이 2002년 출간되었다. 새 번역은 서강대 영문과의 김욱동 교수라는 분이 했는데, 상당히 잘된 번역본인 것 같다. 우선 mockingbird를 ‘앵무새’라고 오역한 사실을 책머리에 밝힌 점과, 마지막에 연보를 붙여서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구한 점이 마음에 든다. 번역문체도 – 아주 꼼꼼히 보진 않았지만 – 좋은 듯하다. 솔직히 대학 교수님 번역은 성의가 없거나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이 책의 번역은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또 보통 10, 20분 정도 원본과 번역본을 대조해보면 오역 한두 개 쯤은 눈에 뜨이는데, 이 책은 한참을 찾아도 못 찾겠다. ^^;

번역본에 대한 궁금한 몇 가지

그래도 번역을 한 김 교수님을 만난다면 몇 가지 묻고 싶은 점이 있다.

우선, 아버지에 대한 호칭. 아이들이 ‘애티커스’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건 그대로 살리는 편이 좋았을 거 같다. 문화적 차이는 감안해야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건 당시 미국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친구인 딜이 묻기를, 너희는 왜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느냐, 하는데 그건 소설 속 인물에게도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특별한 의도로 만든 설정이라고 봐야 옳다. 애티커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 같은데, 번역본에서는 전부 ‘아빠’로 번역되었다.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잘려나간 사례가 아닐까 싶다. (딜이 아이들에게 묻는 장면을 그대로 인용하고 싶은데, 도무지 못 찾겠다. 찾으면 갱신할 생각이다.)

구글링해보니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있다. 바로 여기.

그리고 아버지 말투도 원문보다 권위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원문에선 아이나 흑인에게도 무척 정중한 반면, 번역본 말투는 교장 선생님 분위기가 풍긴다. 굉장히 민주적인 아버지인데, 훈계조 말투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둘째, 남부 사투리와 흑인 말투를 충청도나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한 점. 앨라배마의 메이콤으로 알고 읽던 중에 갑자기 전남 벌교로 공간이동해버리니, 분위기가 영 어색하다. 원문의 말투 차이를 번역하려고 시도한 점은 좋다. 하지만 우리말 사투리보단 조사를 탈락시키는 등, 고의적인 비문을 만드는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별건 아니지만, 이 소설의 악당인 Mr. Ewell의 발음은 ‘유얼’ 또는 ‘유웰’에 가까울 것 같은데, 번역본에서는 ‘이웰’로 표기했다. 또 동네 이름 Maycomb도 저는 ‘메이쿰’이라고 생각했는데, 번역 표기은 ‘메이콤’이다. 골짜기라는 뜻의 comb(combe)이 ‘쿰’으로 발음되긴 하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가 아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영화는 시시하다

1962년에 영화화 되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인 그레고리 펙이 애티커스 역으로 출연했다. 책을 읽은 직후, 벅찬 가슴을 안고 얼른 영화를 찾아서 봤는데, 기대보다 못했다. 60년대 영화치곤 상당히 세련된 오프닝과 후반부에 부 래들리로 잠깐 나오는 젊은 로버트 듀발만 볼만. 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려니 영 허술한 영웅주의 법정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소설의 감동만 간직하시고 영화는 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인 플래너리 오코너 여사께서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애들 소설’이라고 평하셨다. 문학적으로 세련된 작품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 과하다 싶게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여사님 말씀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내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오코너 여사님 작품보다는 이 소설이다. (나중에 크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신념을 지키는 용기’ 같은 근본적인 미덕을 우선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난아무래도 이 소설만큼 설득력 있게 아이에게 올바름을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애티커스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난 이미 글렀다. (털썩…) 언젠가 아이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책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To Kill a Mockingbird (Mass Market Paperback) - 8점
하퍼 리 지음/Warner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