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7일 금요일

중국에서 온 편지 - 슬픈 오이디푸스의 독백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후 장정일 씨가 발표한 첫 소설이다. 이전 글 ‘장정일은 잊지 않았다‘에서 밝혔듯, 나는 몰상식한 사법부의 폭력이 작가 장정일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지 않았을지 걱정스럽다. 상상력과 창작 의지가 꺾이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 실마리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99년 11월에 초판이 나온 이 중편을 읽었다. 그리고 바라던 해답의 절반은 얻은 듯하다.

새롭고 놀라운 장정일 – 독백과 역사

소설은 진시황의 장남 ‘부소’가 독백을 하는 형식이다. 첫 쪽 처음 몇 문장을 읽자마자, 희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작품을 <일월(日月)>이란 희곡으로 고쳐 썼고, 올해 6월엔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일월>은 희곡집 <고르비 전당포>에 수록되어있다. 마침 도서관에 있기에 빌려 봤는데, 소설과 희곡을 비교해 읽는 것도 무척 재미있었다. 같은 내용의 두 작품이 분위기는 자못 다른 점이 흥미롭다.

일인극 속 배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하듯, 부소의 독백은 시황제를 둘러싼 역사적 인물들의 목소리로 변하기를 반복하고, 기원전 200년경의 중국과 현대의 한국 사회를 거림낌 없이 넘나든다. 작가는 이 변화무쌍한 독백을 줄 바꿈 한 번 하지 않고 비단결처럼 매끄럽게 잇는다. 망설임 없이 한 호흡에 써내려간 듯한 이 아름답고 처절한 독백은 남은 페이지가 적어짐을 안타깝게 한다. 책을 다 읽고 시간이 지난 지금, 책을 읽었다는 기억보다도 부소의 목소리를 내 귀로 직접 들었다는 착각이 더 그럴 듯하게 생각되니 묘한 기분이 든다.

독백 다음으로 눈에 띄는 특징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다. 역사소설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임을 감안해도, 적은 분량에 비해 과하다 싶을 만큼 상세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런 측면은, “정신적 외상으로 위축된 상상력을 역사를 수혈 받아 보완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살만 하다. 사실 <삼국지>도 같은 맥락으로 보이고.

하지만 굳이 부정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 딱히 안 될 것도 없는 일이고, 작품 자체가 충분한 완성도와 독립된 매력을 갖췄다면, 일부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듯싶다. (그런데 다음 발표한 장편 <보트 하우스>에선 자기반복적인 모습을 보여서 조금 걱정스럽긴하다.)

작가는 역사의 틈새에 상상력을 채워 넣는다. “재료가 워낙 좋아서 양념을 조금만 해도 좋은 요리가 될 거야.” 이미 충분히 극적인 역사를 밑그림으로 놓고 능란한 솜씨로 주제를 꽃피운다. 마치 역사적 사실마저도 작가가 창작한 것처럼 이 작품은 사실과 상상이 아귀를 잘 맞는다.

낯설지만 편안한

형식면에서 이전의 장정일 소설과 분명히 다르다. 장정일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소설 장르에 대한 해체는, 뭐랄까, 방법이 달라졌다. 얼핏 겉모양만이라도 전통적 소설의 형태를 띠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아예 소설의 외형을 띠지 않으며, 작가도 부소의 입을 빌어 장르 자체를 한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건 소설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고 역사는 더욱 아닐 겁니다. 되기로 한다면 겨우 읽을거리나 될까요.

그런데 오히려 읽기는 더 쉽다. 이전 작품들이 소설 구조에 익숙한 독자를 당혹케 한다면, 이 작품은 익숙함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진시황과 부소의 이야기가 그 나름의 기승전결을 갖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장정일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이 작품 가장 먼저 권할 생각이다.

슬프고 나약한 오이디푸스

처음엔 진시황 이야기를 복귀작으로 고른 장정일 작가의 선택이 의아했는데, 책을 읽어가면서 탁월한 선택임을 깨달았다. 압도적인 체제의 폭력 앞에 장정일 씨가 느꼈을 분노와 무력감을 생각하면, ‘분서갱유’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복합된 진시황-부소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분서갱유 중 분서는 물론 작가가 몸소 경험한 문학에 대한 폭력으로 읽을 수 있겠다.

갱유의 경우가 흥미로운데, 이는 효를 기반한 부-자 관계를 힘으로 지배하고 복종하는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킨다. 유학을 묻어버린 결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표면으로 부상하는 셈. 재미있는 건 유학을 폐한 진시황 스스로가, 거의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꽤 이름이 알려진 어떤 분이 유교문화권에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거나 미약하다, 라고 주장하신 기억이 나는데, 도대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지만, 다시 생각해볼 만한 주장이다.)

아버지의 힘과 아들에 대한 불신(두려움). 그에 대한 부소의 반응은 서글프리만큼 무력하다. 망설임 없이 아버지에게 굴복한다. 아버지의 무정함에 원망과 저주를 퍼붓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아버지를 죽이는 대신 아버지 뜻에 따라 자신이 현실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지도 않았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제국을 탐내지도 않았건만, 슬프고 나약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이 멀어버린다. 부소의 가면을 쓴 자가 바로 작가임을 기억하면, 가슴이 아릴만큼 슬픈 고백이다.

진시황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몽염 장군도 물론 등장하는데, 부소와의 관계가 꽤 재미있다. 나머지 내용은 읽으실 분의 즐거움으로…

그러나 부소는 살아남는다

이 작품이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반부에는 예술가의 빛나는 자부심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결국 부소는 무력하지 않다. 현실 사회를 상징하는 수도 함양이 그를 추방했다면, 유배지인 제국의 북쪽 끝은 피난처이자, 다시 태어난 그가 자라나는 요람이다. 그곳에서 부소는 항상 목말랐던 부성애를 대신할 무엇을 찾는다. 그리고 (뜻대로 되진 않지만) 책을 쓰는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건 그렇고, 전능하신 시황제께서는 그토록 바라시던 영생불사약을 손에 넣으셨던가요?

중국에서 온 편지 - 8점
장정일 지음/작가정신

2008년 11월 2일 일요일

거짓말 - 거짓말을 즐기는 법

거짓말

요즘 장정일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중인데, <내게 거짓말을 해봐>은 결국 구하지 못하고, 그 대신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무삭제판을 봤다. 하도 혹평이 많아서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생각보다 좋은 작품이었다.

흥미로운 영화적(문학적) 장치를 잘 갖췄고, 영화 외적으로도 문화운동적 가치가 큰 작품인데, 관객과 평단의 평가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다. 아쉬운 마음에 나 나름의 토를 달아본다. (쓰고 보니 내용 없이 길기만 길다.)


* 주의! 스포일러 있음!

포르노인가?

위키피디아에 실린 포르노그라피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는 이의 성적인 흥분만을 목적하는, 성적 대상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

이 정의에 따르면, 판단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성적 자극만 본 사람이라면 포르노라고 주장할 테고, 성행위 묘사 이면에 숨은 예술적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당연히 포르노가 아니라고 주장할 터이다. 둘 다 맞다. 욕을 하든 감탄을 하든, 그건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며 권리다.

다만, 자기가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직접 보고 판단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 대다수 대중 – 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시건방진 어떤 놈들은 미풍양속이란 초헌법적이고 근거도 없는 잣대를 꼴리는 대로 휘두르며, 우리의 볼 권리를 제한한다. 왜 그 잘난 놈들은 왜 우리를 판단력 없는 바보로만 보는 걸까?

내 관점으로는, 이 영화는 절대로 포르노가 될 수 없다. 성적 자극만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님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포르노 논쟁을 촉발한 점만 봐도 그렇다. 그런 도발은 우리에게 허락된 표현의 자유가 얼만큼인지 측정하려는 용기있는 시도이며, 또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우리의 예술적 경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상기시키려는 노력이다.

왜 섹스인가?

‘소통을 상징하는 섹스’는 아주 흔한 문학적 장치다. 숨김없이 벌거벗은 두 사람이 피부로 서로를 느끼는 행위는 소통을 감각화하는 좋은 방법이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 사이의 정서적 친밀도가 섹스를 기점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떠올리면, 소통으로서의 섹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섹스로 소통한다는 건 환상일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은유로써 가능하다.)

영화가 주로 제이의 시점이기 때문에, 제이가 와이를 욕망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는 왜 사랑할까? 아마 외롭기 때문일 거다. 가족과 친구가 있는데, 왜 외로울까? 아마 친구, 가족과 나눌 수 없는 무언가를 소통하고자 욕망하기 때문일 거다.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보이고 싶은 마음. 꽁꽁 숨겨둔 열등감과 피해 의식 따위를 위로받고 싶은 마음. 사랑으로 이런 욕망들이 채워질 수 있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마음속 깊이 우린 모두 혼자고 외롭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마음 속 가장 깊은 방의 문을 열고 진심의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다. 제이와 와이도 그들 나름의 소통을 할 뿐이다.

제이는 가학적 성벽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와도 소통하지 못한다. 가학적 성벽은 혐오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건 아닐 거다. 어떤 심리적 원인이 있을 거고,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 조각가이지만 작품(소통의 매개)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도 결국 같은 문제다. 제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일 수밖에 없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통할 사람이 없다. 그러다가 와이가 나타나, 제이의 본모습을 아무 조건 없이 인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진다. 소통에 굶주린 제이에게 와이는 구원자요, “천사”다.

결국 제이와 와이의 사랑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매’라는 방법만 조금 다를 뿐.

왜 폭력인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우선 ‘일상(제도)적인 폭력에 대한 은유’가 먼저 떠오른다. 단순한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강요’와 ‘문화’라는 형태의 폭력까지 생각하면, 사회생활을 하는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박노자 선생의 <당신들의 대한민국>를 읽어보자.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다.)

폭력의 재생산은 얼마나 흔한가. 내가 받은 폭력을 나보다 약한 녀석에게 고스란히 물려 줄 때의 쾌감. 매에 복종하고 매로 복종시키는 일이 일상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가 사디스트-매저키스트다. 폭력 없이는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 난 수도 없이 많이 봤다. (물론 이 매는 진짜 매일 수도 있고, 어떤 무형의 강제력일 수도 있다.) 어머니-아들, 선생-제자 관계를 흉내 내는 둘의 모습에서 작가의 그런 의도가 비교적 잘 드러난다. 이들의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내 능력 밖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해석을 영화 구석구석에 숨겨두었다. (그러므로 섹스와 폭력을 타자화하고 분석을 시도하는 이 영화는 포르노가 될 수 없다.)

영화 속 폭력은 가짜다. 하지만 우리의 폭력은 진짜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속 폭력은 모두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를 채찍질한 사법부 무뢰배들의 폭력은 진짜 폭력이다. 가공인물의 사랑법에 대해 정색하고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있지도 않은 미풍양속 따위를 들먹이며 다수의 틀 바깥에 선 약자를 괴롭히는 것들은 진짜 사디스트 폭력배들이다.

왜 거짓말인가?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종종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작품 속 인물이 실존 인물이거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을 거란 착각. 작품 속 행위를 현실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필요하다면) 단죄해야 한다는 착각. 이런 착각은 ‘작품과의 거리 두기’를 실패할 경우 발생한다. 착각(또는 몰입)도 작품을 즐기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불륜남을 연기한 배우를 괄시하는 식당 아주머니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구분하려면,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모두 새.빨.간.거.짓.말.

영화 초반 배우들의 인터뷰는 “영화는 다 뻥이다”라는 선언이다. 또, 한참 성관계 중이지만 전혀 발기하지 않은 제이의 성기나 ‘공사’가 다 보이는 와이의 샅, 도저히 각도가 나오지 않는 체위, 어설픈 연기와 대사 처리 등은 ‘영화’를, ‘거짓말’을 보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작가는 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가 다 거짓말일 뿐이며, 가공의 인물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사법적 평가 따위는 웃기는 짓이라고 말한다. 원작자인 장정일이 뭣도 모르는 촌놈들에게 무참하게 얻어터진 일을 떠올리면, 이런 장치는 영리한 보험인 동시에, 꽤 신랄한 조롱이다.

이 밖에도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 나는 ‘위선’이나 ‘소통의 거부’ 등을 떠올렸지만, 문학적 소양이 깊은 분은 더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거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지며 영화를 끝맺음합니다.

아내는 허벅지에 쓰인 ‘내 님’이 누구냐고 물었고,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이와 와이는 누구인가?

작가는 와이의 입을 빌려, 그들의 정체에 대한 노골적인 힌트를 날린다.

나는 백만 인이 싫어.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존중하는 그런 나라가 좋더라.

세련된 방식은 아니지만, 작가는 ‘표현의 자유’ 문제가 결국은 우리의 ‘의식 구조’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포르노라는 단어에만 혹한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이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작가로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도 구분 못 하는 사회를 살아가기는 정말 힘들 거다.

내가 본 제이와 와이는 ‘소수자’다. 누구는 이들을 혐오하지만, 물 밖에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사랑 방식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들은 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옹호할 필요도,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냥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권리를 조용히 존중하면 그만이다.

꼭 제이와 와이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동성애자다. 이들은 장애인이다. 이들은 흑인 아버지를 둔 아이다. 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다. 이들은 비정규직 근로자다. 이들은 철거민이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이다.

지금 우리는 다수의 이름으로 이들을 폭행하며 쾌감을 느끼고 있지 않나?

링크

교환일기 혹은 이야기2 – 이창동 감독, <거짓말>을 보고
성인됨을 상실한 성인남자의 비가, <거짓말>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장정일은 잊지 않았다

소설가 장정일 씨의 작품을 모두 읽어볼 생각인데, 지금 떠오르는 단상을 기록해 본다.

이제 장정일 씨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그래서 1997년 이후 첫 소설인 <중국에서 온 편지>을 찾아 읽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의심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 작풍이 바뀌었을 뿐인지, 아니면 이젠 소설 비슷한 무엇밖에 쓸 수 없게 되었는지, 영 모르겠다. 다만 그 개자식들이 소설가 장정일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상처는 이제 그저 흉터로만 남았을까, 아니면 곪아 터지고 썩어 문드러져 살점까지 몽땅 도려내야 했을까.

장정일의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그를 꽤 좋아한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이후 줄곧 호감을 품었다. 고1 겨울 방학에 읽은 <재즈>는 하늘을 걷는 사람을 직접 본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그때까지 제가 읽었던 그 어느 소설과도 달랐고, 또 재미있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돈을 주고 시집을 산 건 그게 두 번째였다. 점심 시간에 <햄버거>를 읽는 내게 친구가 물었다. “너 미쳤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새끼 천재야.”

그리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발표되었다. 신나서 서점으로 달려갔다. 이미 다 수거된 뒤였다. 이유도 몰랐다. 책방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거 나쁜 책이야. 학생이 읽으면 큰일 나는 책이야” 하고 나를 나무라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지 못했다. 개자식들이 내게서 책을 빼앗았고 아직까지도 돌려주지 않았다.

모 공기업에서 경비원으로 일할 즈음, 장정일 씨는 문화일보에 <삼국지>를 연재했다. 경비원 생활이라는 게 지루함의 연속인데, 삼국지 덕분에 금요일 오후의 10분은 늘 즐거웠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알던 장정일이 아니었다. 장정일이 아닌 다른 누가 썼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그저 ‘삼국지’였다.

일전에 <장정일의 공부>의 독후감을 썼다. 그 책 말미에 ‘대중독재론과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통점’이라는 소단원이 있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그 단원 어디에도 <거짓말>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저 “대중독재, 권력과 국민이 무언의 협정을 맺고 민주주의 체제 내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현상”에 대한 설명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감상을 쓰는 도중에 문득 깨달았다. 장정일은 잊지 않았다.

소설가 장정일을 찌른 칼은 대중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