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9일 금요일

여행할 권리 - 너와 내가 만나는 곳에서

기행문을 좋아하는데, 많이 읽진 않는다. 좋은 기행문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이 적다기 보단, 이런저런 외국 탐방기가 워낙 많은 탓이다. 그만큼 수요가 있으니 꾸준히 나오겠지만, 아무튼 다들 기행문을 쉽게 도전할 만한 장르라고 여기나 보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기행문도 수필의 한 갈래이니, 가다듬은 생각을 낯선 장소라는 소재와 버무려 글로 빗어내는 솜씨가 관건이겠다. 이국 풍물 소개가 아무리 재미난 글이라도, 생각과 솜씨가 변변치 않은 글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다시 말해, 여행자의 진지한 탐구의식과 문학성이 결여된 기행문은 미지근하고 퉁퉁 불은 콩국수와 다름 없다는 거다. (왜 하필 콩국수냐고는 묻지 마시라. 어제 점심에 겪은 재앙을 다시 떠올리고 싶진 않으니.)

운 좋게도 좋은 기행문이랄 만한 책을 몇 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가운데 존 스타인벡 옹의 <Travels with Charley>와 하루키 형님의 <슬픈 외국어>는 지금도 가까이 두고 종종 꺼내본다. (전자는 <찰리와 함께 한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꽤 좋은 번역본이 나와있다. 그리고 <슬픈 외국어>는 기행문이 아닐지도…) 좋아하는 두 작가의 목소리로 듣는 이방인 특유의 시야와 정서는 곱씹을수록 쫄깃하다.

이 두 권의 책 옆에 김연수 작가의 <여행할 권리>를 꽂아두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결국 사고 만 책이다. 통념과 달리, 도서관은 책 구입비 절감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꽤 좋은 도서관이 있는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오히려 책을 더 사고 있다.) 두고두고 읽을 만한 김연수 표 문장뿐만 아니라, 내 관심의 사각지대를 향하는 작가의 시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지 않을 도리가 있나. 고백하자면, 아내 몰래 김연수 씨 책을 한 권 한 권 사 모으고 있다. 마님은 빌려 읽은 책을 다시 사 보는 걸 이해하지 못하신다. 본래 타인의 취미라는 게 다 그렇지만.

국경 없는 나라

처음부터 흥미를 잡아끄는 건 ‘국경 없는 나라’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 반도의 남쪽 절반은 실은 ‘섬’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린 한 번이라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고민해보긴 한 걸까. 작가의 여행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작가가 말하는 ‘국경’은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넘을 수 있는 선. 둘 이상의 집단을 따로 나누되, 나뉜 것들이 필연적으로 뒤섞이는 곳. 이곳과 저곳을 분명히 가르되, 그 차이가 큰 의미가 없는 곳이다. 우리에게 그런 곳이 있던가. 우리는 사실 우리-남을 가르는 데 천재적인 족속이긴 하지. 작가는 그런 우리를 슬픈 눈으로 되돌아본다. 우리와 남이 만나는 곳, 작가가 고집스레 그런 곳을 찾아가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공교롭게도 난 우리를 둘러싼 (작가에 따르자면) 유사-국경에 대해 조금은 아는 편이다. 작년인 2008년 9월까지 남쪽 끝인 서귀포에 살다가, 이젠 북쪽 끝인 휴전선 바로 아래 살고 있으니까. 차로 5분만 나가면 북녘 땅이 훤히, 말 그대로 훤히 보인다.

작가는 휴전선 이북을 바다와 같다고 말했지만, 내겐 신기루인 것만 같다. 매일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볼 땐 – 그렇다. 난 창문에서 바다가 바로 내다보이는 집에 살았던 것이다! –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 미지의 무언가가 떠올렸다. 그렇지만, 휴전선 너머로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다. 잿빛 벽에 그린 그럴듯한 벽화 같기도 하다. 무언가 상상해보려 해도 저놈의 철조망만 보면 죄다 사라지고 만다. 갈 수 없는 곳이란 그런 것이다.

작가가 찾는 국경은 응당 ‘사람이 지나는 곳’이지만, 우리에게 국경은 ‘단절’을 뜻한다. 그 중간에 걸치는 건 모두 배신, 배반일 뿐이다. 단적인 예는 재일-재중교포를 대하는 남한인들의 태도다. “너 뭐냐, 한국 사람이냐, 쪽발이냐, 짱깨냐.” 정녕 그 세 가지 답안으로 그들의 정체성이 구분된다고 믿는 걸까?

여행할 권리란 뜻대로 국경을 넘을 권리,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때론 부담스러운 이름표를 잠시 떼어놓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뒷이야기

김연수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면, “도대체 이런 작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비슷한 경외감이 들긴 하지만, 김연수 작품의 경우, 특히 그 배경이 대단히 생생하기 때문에 더욱 호기심이 인다.

그 대답 일부가 들었기에 이 책은 더욱 값지다. 최근작 <밤은 노래한다>에 관한 내용이 많으니까, 둘이 세트라고 해도 좋겠다.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한참 뒤에 이 책을 읽었음에도, 작품에 대한 작가의 언급(설명?)이 무척 재미있다. <굳빠이 이상>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다른 작품 관련한 내용도 있는 듯한데 김연수 팬 필수 아이템이랄 만하다.

단, 작품에 앞서 이 책을 먼저 읽는 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이유인즉슨, <밤>의 경우, 작가 스스로 어느 인터뷰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라고 말해놓고는, 이 책에서 속마음을 슬쩍-홀딱 털어놓기 때문이다. 이건 감상에 방해될 법도 하다. 아무래도 실수하신 듯싶지만, 그래도 작품 뒷이야기는 즐겁다.

노란 동그라미

이 책엔 결정적인 단점 한 가지가 존재한다. 280쪽이 넘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매번 약 0.6초 동안 사팔뜨기가 되곤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양 책장 사이에 샛노란 동그라미를 그려 넣을 생각을 떠올린 이는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는 이 터무니없는 디자인을 승인한 편집자의 죄가 더 크다. 어느 날 창비 사옥 앞 – 우리집에서 차로 15분 거리다! –에서 한 손에 노란 페인트통, 한 손에 <여행할 권리>를 들고 서성이는 아저씨를 본다면 나라고 생각해도 좋다. 네놈들 미간에다 큼지막한 노란 원을 그려 넣고 말 테다!

덧말

이 책을 소개하려면 “재밌고 유익하고 강추다.”라고 한 문장만 써도 될 걸, 길게도 쓰고 말았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흥분해서 호들갑을 떤다는 거, 알만한 분은 아시겠지만.

그리고 김 작가님의 '배우 데뷔설'은 사실로 밝혀졌다. 극장행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 후후.

링크

여행할 권리 - 8점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잘도 못생긴 얼굴

어제, 하루종일 가슴이 먹먹하고 코끝이 시큰했다.
자려고 누웠더니, 그 못생긴 얼굴이 천장에 그려졌다.
추억하며 잠들었더니, 꿈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고 일어났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