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일 일요일

나의 레종 데트르 - 문화평론가 김갑수의 ‘책은 내 운명’

문화평론가이자 시인, 음악애호가로 잘 알려진 김갑수의 근작 <나의 레종 데트르>.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쓴 예전 글이 황송하게도 알라딘의 ‘이 주의 TTB 리뷰’ 에 선정되면서 받은 적립금으로 구입한 책. 말하자면 공짜 책인데, 알짜를 건졌다.

독서만을 위한 독서

제목과 부제에 드러나듯, 저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책’이라고 선언한다. 평론가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직업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 김갑수에게 독서는 아무런 목적도, 대가도, 이유도 없는, 그저 ‘독서만을 위한 독서’이라는 말씀. 책을 읽으며 느끼는 즐거움이 김갑수의 존재 이유이며, 다른 일은 그 존재 이유를 계속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독서만을 위한 독서는 얼핏 당연하게 들리지만, 실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면 독서엔 늘 이유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과연 즐거움만을 위해서 책을 읽고 있을까? 대체로 아닐 걸? 고백하건데, 지금껏 억지로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은가! 무식을 감추기 위해 흥미 없는 책을 뒤적이는 기분은 얼마나 한심한가! 다들 읽었다기에 뒤쳐진 기분에 억지로 읽은 책도 참 많다. 대부분 시간낭비였다. 그 밖에도 시험 때문에, 취직 때문에, 잘난 척 하려고, 거절하기 힘든 누가 권해서 등등의 이유로 책을 읽은 경험. 나만의 것은 아닐 터이다. 독서를 위한 독서, 쉬운 일이 아니다.

독서만을 위한 독서가 꼭 옳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선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아니, ‘유한계급의 지적 호사’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책에서 얻는 (쾌락 외) 이득을 모조리 배제하고 나면, 독서는 그저 유희일 뿐인데, 유희치고는 지적인 노력과 시간이 꽤 많이 든다. 산업사회의 톱니바퀴로 혹사 당하는 현대인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무척 부러울 따름.

문장가의 독서노트

일견 다독가의 꼼꼼한 독서 노트 같기도 하고, 흔한 일간지 신간 소개 기사 같기도 하고, 지인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는 편지 같기도 하고, 크게 보면 이 허접한 블로그와도 비슷한 듯도 하다. 물론 저자와 이 몸의 내공 차이가 하늘과 땅이니, 비교 자체가 이 책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겠지만.

책장을 넘기면, 저자의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넓디넓은 인문학 지식이 활자에서 묻어난다. 마구 솟아나는 존경심을 ‘응, 비평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하면서 애써 억눌렀다. 다채로운 어휘과 세련된 문장이 감탄스럽다. 다양한 느낌의 문체를 넘나들며,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깔끔한 문장을 인디아나 존스 채찍 휘두르듯 자유자재로 휘두르는데, 이 사람, (거의) 대가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은 기름기 쪽 뺀 단문이지만, 멋을 부린 문장도 김갑수의 문장 정도면 나쁘지 않다.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도 종종 발견했지만, 그건 내 무식 때문이지, 문장 탓은 아니었고.

최고급 구라꾼의 입담에 빠져보시라

어쩌면 난 김갑수의 팬이었는지 모른다. KBS의 <TV, 책을 말하다> 프로를 되는대로 열심히 챙겨 보는데, 그의 발언을 들어보면 정말 ‘최상급 대담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장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저자의 진지하고 부드러운 설득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귀가 쫑긋거리는 걸 막기 힘들다. 이 책의 첫 장 ‘성교’에 나오는 저자의 ‘세련된 테니스 섹스’ 고백이 구라가 아닐 거라는 확신마저 드니, 과연 달변이다. 이 정도의 달변가가 ‘오늘밤 나와 자야하는 이유’를 동서고금의 낭만적인 금언들과 함께 분수처럼 쏟아낸다면, 어떤 여자라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을 듯. 말에 취한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 아래 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누님들이 느끼셨을 그 찹찹함, 저는 이해합니다요.

김갑수의 눈으로 읽기

목차만 본다면, 주제별로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하는 메타북 같다. 저자는 현대 소설, 고전, 시집, 인문학서, 교양서 가릴 것 없이, 모든 종류의 책에 대한 감상과 평을 예의 유려한 문체로 풀어 놓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유익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독후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저자에게 책은 매개일 뿐이다. 어떤 구절을 읽다보면, 저자에게 책은 생각을 자극하는 촉매일 뿐이고 독자는 말없는 구경꾼일 뿐이라는, 소외감마저 든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책과 생각을 주고 받으며, 저자는 자기 ‘사상’을 제법 농도 진한 어조로 독자 앞에 내놓는다. 종종 저자의 주장이 너무 강해서, 그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가질 법도 하다. 나야 대부분 동의하며 읽었지만.

내가 모르는 책들을 누구나 아는 책처럼 마구마구 언급하는 통에, 내 부족한 독서량에 대한 초조감이 들었고, 얼른 읽고 싶어졌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한 평을 읽을 때는 내가 보지 목한 것들을 보는 저자의 박식함과 예리함에 기가 팍팍 죽었지만, 익숙한 책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무척 재미있다. 국내 출판계에 이런저런 연 때문이지, 국내 작가에 대해선 평이 다소 후한 듯 싶지만, 욕이 나올 때는 나오니까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갖춘 평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겠다.

독서에 목마른 당신이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만한 책이다. 저자의 표현을 살짝 따라하자면, ‘책으로 푸는 일등급 구라’정도? “아무튼 읽을 만한 책 없나…”하고 방황하시는 분이라면, 이 블로그 같은 후미진 구석을 헤매실 게 아니라, 당장 동네 책방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 <나의 레종 데트르>를 찾아보시길. 당장 손에 잡히는 책이 없는 사람이라면 보물지도를 발견한 기분이 들 거다.

나의 레종 데트르 - 6점
김갑수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