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일요일

캐비닛 - 굉장히 재미있고 슬프고 무서운 농담

그야말로 우연히 읽은 소설. 김연수 씨의 작품을 훑던 중 실수로 뽑아든 책이다. “어, 김언-수네!”하고 도로 서가에 넣으려다가, 특이한 표지에 끌려 슬-쩍 들춰봤는데, 첫 문단부터 너무 재밌어서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공모전 대상작에, 꽤나 인기 있는 작품이다. 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 세상엔 재밌는 소설과 재능있는 작가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황당하고 근사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공기업 산하 연구소에 근무하는 공 대리(30, 총각)가 관리하는 '13호 캐비닛' 안에는 '권 박사' 영감이 40년 동안 모은, '심토머'에 대한 파일이 가득하다. 심토머는 도시 속에서 발현한 돌연변이, 또는 신인류. 공 대리의 하루 일과라면 심토머들과의 전화 상담 및 파일 관리다. 평범하진 않지만 나름 평온한 일상을 사는 공 대리. 그의 앞에 13호 캐비닛을 노리는 악당이 등장한다.

언뜻 유치뽕짝한 장르물 같은 줄거리지만, 이래봬도 '문학동네 소설상' 12회 수상작이다. 문학동네 책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에도 만족스럽다. 공모전 수상작답게 균형 잡힌 좋은 작품이고, 특히 읽는 재미가 굉장히 좋다. 문장 읽는 맛이 새콤달콤 최고다!

구라의 융단폭격

깔끔명료한 문체가 페이지 도둑이다. 군더더기 없고 리듬감 좋은 문장을 읽는 기분이 상쾌하다. 무심결에 한두 쪽을 읽고 나니, 활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런 짜릿한 경험, 꽤 오랜만이다. 흡입력 있는 문장이라 하면 바로 이런 문장이다.

작가는 정말 이야기꾼이다. 첫 장부터 탐색전도 없이 황홀한 구라의 융단 폭격을 퍼부어대는데, 몰입감이 굉장하다. 만약 이런 작품이 재미없다면 그대는 본래 남의 농담에 잘 웃지 않는 사람일 거다. 흥!

당대 어느 ‘구라 계열’ 작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한 말장난 솜씨를 뽑낸다. 농담의 속사포라 할 만한데, 이 정도의 개그 난사를 퍼부을 수 있는 자는 둘 중 하나다. 바보 아니면 자신감 넘치는 베테랑 구라쟁이. 물론 김언수 씨는 후자다.이 작품이 장편 데뷔작이라는데, 신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자신감이 놀랍고 매력적이다.

뜻밖의 클라이맥스

2부까지는 흥겨울 뿐인데, 3부 '부비트랩'에선 분위기가 일변한다. 새벽녘에 혼자 읽다가 그 섬뜩함에 깜짝 놀랐다.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태연하게 앉아있기 어려울 만큼 강렬하고 흉폭하다. 이건 뭐, 굉장히 내 취향이다. 으음, 정말 매력적인 소설이다. ^^

정말 끔찍한 괴물

심토머는 돌연변이지만, 정말 끔찍한 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드는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괴물 아닌가.

작가는 때론 은근히, 때론 노골적으로 거대 도시와 자본주의의 무자비함을 이야기한다. 주제를 전달하는 방법이 약간 투박한 듯도 싶지만, 이만하면 자기가 심토머인지도 모르는 독자에게는 꽤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은 확실히 농담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한참 깔깔거리다가 돌아서면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다. 작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체제가 사실 우리를 돌연변이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진부한 얘기지만, 문학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볼 기회를 만든다. 이 작품을 읽은 누군가가, “그래,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분석하고 더 나은 세계를 꿈꿔야만, 우리를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 속 톱니바퀴로 만들려는 놈들로부터 (정신만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면, 그 어느 누가 문학의 가치를 폄하할 수 있을까.

<캐비닛>은 우습고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슬프다. 누구는 결말이 싱겁다고 하지만,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설득력 있는 결말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아주 조금 아쉬운 밀도

아쉬운 점도 있다. 괜한 트집인지 모르지만, 분량이 약간 많은 느낌이다. 350쪽이 넘는 분량인데, 250쪽 정도 압축했으면 더 좋았을 지 모르겠다. 1부와 2부의 일부가 좀 처지는 느낌. 여러 심토머를 쭉 나열하는 구성인데,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니 살짝 지루한 감이 있다. 조금만 더 속도를 냈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뭐, 이대로도 좋다. TV 시리즈물 같기도 하고.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꼽으라면,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인 더 풀> 정도. 두 작품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이라면 이 작품도 좋아하실 듯. 물론 난 이 작품이 더 좋지만. 아아,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캐비닛 - 8점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중국에서 온 편지 - 슬픈 오이디푸스의 독백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후 장정일 씨가 발표한 첫 소설이다. 이전 글 ‘장정일은 잊지 않았다‘에서 밝혔듯, 나는 몰상식한 사법부의 폭력이 작가 장정일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지 않았을지 걱정스럽다. 상상력과 창작 의지가 꺾이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 실마리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99년 11월에 초판이 나온 이 중편을 읽었다. 그리고 바라던 해답의 절반은 얻은 듯하다.

새롭고 놀라운 장정일 – 독백과 역사

소설은 진시황의 장남 ‘부소’가 독백을 하는 형식이다. 첫 쪽 처음 몇 문장을 읽자마자, 희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작품을 <일월(日月)>이란 희곡으로 고쳐 썼고, 올해 6월엔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일월>은 희곡집 <고르비 전당포>에 수록되어있다. 마침 도서관에 있기에 빌려 봤는데, 소설과 희곡을 비교해 읽는 것도 무척 재미있었다. 같은 내용의 두 작품이 분위기는 자못 다른 점이 흥미롭다.

일인극 속 배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하듯, 부소의 독백은 시황제를 둘러싼 역사적 인물들의 목소리로 변하기를 반복하고, 기원전 200년경의 중국과 현대의 한국 사회를 거림낌 없이 넘나든다. 작가는 이 변화무쌍한 독백을 줄 바꿈 한 번 하지 않고 비단결처럼 매끄럽게 잇는다. 망설임 없이 한 호흡에 써내려간 듯한 이 아름답고 처절한 독백은 남은 페이지가 적어짐을 안타깝게 한다. 책을 다 읽고 시간이 지난 지금, 책을 읽었다는 기억보다도 부소의 목소리를 내 귀로 직접 들었다는 착각이 더 그럴 듯하게 생각되니 묘한 기분이 든다.

독백 다음으로 눈에 띄는 특징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다. 역사소설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임을 감안해도, 적은 분량에 비해 과하다 싶을 만큼 상세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런 측면은, “정신적 외상으로 위축된 상상력을 역사를 수혈 받아 보완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살만 하다. 사실 <삼국지>도 같은 맥락으로 보이고.

하지만 굳이 부정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 딱히 안 될 것도 없는 일이고, 작품 자체가 충분한 완성도와 독립된 매력을 갖췄다면, 일부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듯싶다. (그런데 다음 발표한 장편 <보트 하우스>에선 자기반복적인 모습을 보여서 조금 걱정스럽긴하다.)

작가는 역사의 틈새에 상상력을 채워 넣는다. “재료가 워낙 좋아서 양념을 조금만 해도 좋은 요리가 될 거야.” 이미 충분히 극적인 역사를 밑그림으로 놓고 능란한 솜씨로 주제를 꽃피운다. 마치 역사적 사실마저도 작가가 창작한 것처럼 이 작품은 사실과 상상이 아귀를 잘 맞는다.

낯설지만 편안한

형식면에서 이전의 장정일 소설과 분명히 다르다. 장정일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소설 장르에 대한 해체는, 뭐랄까, 방법이 달라졌다. 얼핏 겉모양만이라도 전통적 소설의 형태를 띠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아예 소설의 외형을 띠지 않으며, 작가도 부소의 입을 빌어 장르 자체를 한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건 소설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고 역사는 더욱 아닐 겁니다. 되기로 한다면 겨우 읽을거리나 될까요.

그런데 오히려 읽기는 더 쉽다. 이전 작품들이 소설 구조에 익숙한 독자를 당혹케 한다면, 이 작품은 익숙함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진시황과 부소의 이야기가 그 나름의 기승전결을 갖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장정일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이 작품 가장 먼저 권할 생각이다.

슬프고 나약한 오이디푸스

처음엔 진시황 이야기를 복귀작으로 고른 장정일 작가의 선택이 의아했는데, 책을 읽어가면서 탁월한 선택임을 깨달았다. 압도적인 체제의 폭력 앞에 장정일 씨가 느꼈을 분노와 무력감을 생각하면, ‘분서갱유’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복합된 진시황-부소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분서갱유 중 분서는 물론 작가가 몸소 경험한 문학에 대한 폭력으로 읽을 수 있겠다.

갱유의 경우가 흥미로운데, 이는 효를 기반한 부-자 관계를 힘으로 지배하고 복종하는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킨다. 유학을 묻어버린 결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표면으로 부상하는 셈. 재미있는 건 유학을 폐한 진시황 스스로가, 거의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꽤 이름이 알려진 어떤 분이 유교문화권에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거나 미약하다, 라고 주장하신 기억이 나는데, 도대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지만, 다시 생각해볼 만한 주장이다.)

아버지의 힘과 아들에 대한 불신(두려움). 그에 대한 부소의 반응은 서글프리만큼 무력하다. 망설임 없이 아버지에게 굴복한다. 아버지의 무정함에 원망과 저주를 퍼붓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아버지를 죽이는 대신 아버지 뜻에 따라 자신이 현실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지도 않았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제국을 탐내지도 않았건만, 슬프고 나약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이 멀어버린다. 부소의 가면을 쓴 자가 바로 작가임을 기억하면, 가슴이 아릴만큼 슬픈 고백이다.

진시황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몽염 장군도 물론 등장하는데, 부소와의 관계가 꽤 재미있다. 나머지 내용은 읽으실 분의 즐거움으로…

그러나 부소는 살아남는다

이 작품이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반부에는 예술가의 빛나는 자부심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결국 부소는 무력하지 않다. 현실 사회를 상징하는 수도 함양이 그를 추방했다면, 유배지인 제국의 북쪽 끝은 피난처이자, 다시 태어난 그가 자라나는 요람이다. 그곳에서 부소는 항상 목말랐던 부성애를 대신할 무엇을 찾는다. 그리고 (뜻대로 되진 않지만) 책을 쓰는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건 그렇고, 전능하신 시황제께서는 그토록 바라시던 영생불사약을 손에 넣으셨던가요?

중국에서 온 편지 - 8점
장정일 지음/작가정신

2008년 11월 2일 일요일

거짓말 - 거짓말을 즐기는 법

거짓말

요즘 장정일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중인데, <내게 거짓말을 해봐>은 결국 구하지 못하고, 그 대신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무삭제판을 봤다. 하도 혹평이 많아서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생각보다 좋은 작품이었다.

흥미로운 영화적(문학적) 장치를 잘 갖췄고, 영화 외적으로도 문화운동적 가치가 큰 작품인데, 관객과 평단의 평가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다. 아쉬운 마음에 나 나름의 토를 달아본다. (쓰고 보니 내용 없이 길기만 길다.)


* 주의! 스포일러 있음!

포르노인가?

위키피디아에 실린 포르노그라피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는 이의 성적인 흥분만을 목적하는, 성적 대상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

이 정의에 따르면, 판단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성적 자극만 본 사람이라면 포르노라고 주장할 테고, 성행위 묘사 이면에 숨은 예술적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당연히 포르노가 아니라고 주장할 터이다. 둘 다 맞다. 욕을 하든 감탄을 하든, 그건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며 권리다.

다만, 자기가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직접 보고 판단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 대다수 대중 – 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시건방진 어떤 놈들은 미풍양속이란 초헌법적이고 근거도 없는 잣대를 꼴리는 대로 휘두르며, 우리의 볼 권리를 제한한다. 왜 그 잘난 놈들은 왜 우리를 판단력 없는 바보로만 보는 걸까?

내 관점으로는, 이 영화는 절대로 포르노가 될 수 없다. 성적 자극만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님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포르노 논쟁을 촉발한 점만 봐도 그렇다. 그런 도발은 우리에게 허락된 표현의 자유가 얼만큼인지 측정하려는 용기있는 시도이며, 또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우리의 예술적 경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상기시키려는 노력이다.

왜 섹스인가?

‘소통을 상징하는 섹스’는 아주 흔한 문학적 장치다. 숨김없이 벌거벗은 두 사람이 피부로 서로를 느끼는 행위는 소통을 감각화하는 좋은 방법이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 사이의 정서적 친밀도가 섹스를 기점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떠올리면, 소통으로서의 섹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섹스로 소통한다는 건 환상일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은유로써 가능하다.)

영화가 주로 제이의 시점이기 때문에, 제이가 와이를 욕망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는 왜 사랑할까? 아마 외롭기 때문일 거다. 가족과 친구가 있는데, 왜 외로울까? 아마 친구, 가족과 나눌 수 없는 무언가를 소통하고자 욕망하기 때문일 거다.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보이고 싶은 마음. 꽁꽁 숨겨둔 열등감과 피해 의식 따위를 위로받고 싶은 마음. 사랑으로 이런 욕망들이 채워질 수 있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마음속 깊이 우린 모두 혼자고 외롭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마음 속 가장 깊은 방의 문을 열고 진심의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다. 제이와 와이도 그들 나름의 소통을 할 뿐이다.

제이는 가학적 성벽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와도 소통하지 못한다. 가학적 성벽은 혐오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건 아닐 거다. 어떤 심리적 원인이 있을 거고,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 조각가이지만 작품(소통의 매개)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도 결국 같은 문제다. 제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일 수밖에 없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통할 사람이 없다. 그러다가 와이가 나타나, 제이의 본모습을 아무 조건 없이 인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진다. 소통에 굶주린 제이에게 와이는 구원자요, “천사”다.

결국 제이와 와이의 사랑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매’라는 방법만 조금 다를 뿐.

왜 폭력인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우선 ‘일상(제도)적인 폭력에 대한 은유’가 먼저 떠오른다. 단순한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강요’와 ‘문화’라는 형태의 폭력까지 생각하면, 사회생활을 하는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박노자 선생의 <당신들의 대한민국>를 읽어보자.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다.)

폭력의 재생산은 얼마나 흔한가. 내가 받은 폭력을 나보다 약한 녀석에게 고스란히 물려 줄 때의 쾌감. 매에 복종하고 매로 복종시키는 일이 일상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가 사디스트-매저키스트다. 폭력 없이는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 난 수도 없이 많이 봤다. (물론 이 매는 진짜 매일 수도 있고, 어떤 무형의 강제력일 수도 있다.) 어머니-아들, 선생-제자 관계를 흉내 내는 둘의 모습에서 작가의 그런 의도가 비교적 잘 드러난다. 이들의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내 능력 밖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해석을 영화 구석구석에 숨겨두었다. (그러므로 섹스와 폭력을 타자화하고 분석을 시도하는 이 영화는 포르노가 될 수 없다.)

영화 속 폭력은 가짜다. 하지만 우리의 폭력은 진짜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속 폭력은 모두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를 채찍질한 사법부 무뢰배들의 폭력은 진짜 폭력이다. 가공인물의 사랑법에 대해 정색하고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있지도 않은 미풍양속 따위를 들먹이며 다수의 틀 바깥에 선 약자를 괴롭히는 것들은 진짜 사디스트 폭력배들이다.

왜 거짓말인가?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종종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작품 속 인물이 실존 인물이거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을 거란 착각. 작품 속 행위를 현실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필요하다면) 단죄해야 한다는 착각. 이런 착각은 ‘작품과의 거리 두기’를 실패할 경우 발생한다. 착각(또는 몰입)도 작품을 즐기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불륜남을 연기한 배우를 괄시하는 식당 아주머니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구분하려면,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모두 새.빨.간.거.짓.말.

영화 초반 배우들의 인터뷰는 “영화는 다 뻥이다”라는 선언이다. 또, 한참 성관계 중이지만 전혀 발기하지 않은 제이의 성기나 ‘공사’가 다 보이는 와이의 샅, 도저히 각도가 나오지 않는 체위, 어설픈 연기와 대사 처리 등은 ‘영화’를, ‘거짓말’을 보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작가는 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가 다 거짓말일 뿐이며, 가공의 인물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사법적 평가 따위는 웃기는 짓이라고 말한다. 원작자인 장정일이 뭣도 모르는 촌놈들에게 무참하게 얻어터진 일을 떠올리면, 이런 장치는 영리한 보험인 동시에, 꽤 신랄한 조롱이다.

이 밖에도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 나는 ‘위선’이나 ‘소통의 거부’ 등을 떠올렸지만, 문학적 소양이 깊은 분은 더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거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지며 영화를 끝맺음합니다.

아내는 허벅지에 쓰인 ‘내 님’이 누구냐고 물었고,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이와 와이는 누구인가?

작가는 와이의 입을 빌려, 그들의 정체에 대한 노골적인 힌트를 날린다.

나는 백만 인이 싫어.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존중하는 그런 나라가 좋더라.

세련된 방식은 아니지만, 작가는 ‘표현의 자유’ 문제가 결국은 우리의 ‘의식 구조’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포르노라는 단어에만 혹한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이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작가로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도 구분 못 하는 사회를 살아가기는 정말 힘들 거다.

내가 본 제이와 와이는 ‘소수자’다. 누구는 이들을 혐오하지만, 물 밖에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사랑 방식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들은 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옹호할 필요도,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냥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권리를 조용히 존중하면 그만이다.

꼭 제이와 와이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동성애자다. 이들은 장애인이다. 이들은 흑인 아버지를 둔 아이다. 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다. 이들은 비정규직 근로자다. 이들은 철거민이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이다.

지금 우리는 다수의 이름으로 이들을 폭행하며 쾌감을 느끼고 있지 않나?

링크

교환일기 혹은 이야기2 – 이창동 감독, <거짓말>을 보고
성인됨을 상실한 성인남자의 비가, <거짓말>

2008년 11월 1일 토요일

장정일은 잊지 않았다

소설가 장정일 씨의 작품을 모두 읽어볼 생각인데, 지금 떠오르는 단상을 기록해 본다.

이제 장정일 씨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그래서 1997년 이후 첫 소설인 <중국에서 온 편지>을 찾아 읽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의심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 작풍이 바뀌었을 뿐인지, 아니면 이젠 소설 비슷한 무엇밖에 쓸 수 없게 되었는지, 영 모르겠다. 다만 그 개자식들이 소설가 장정일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상처는 이제 그저 흉터로만 남았을까, 아니면 곪아 터지고 썩어 문드러져 살점까지 몽땅 도려내야 했을까.

장정일의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그를 꽤 좋아한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이후 줄곧 호감을 품었다. 고1 겨울 방학에 읽은 <재즈>는 하늘을 걷는 사람을 직접 본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그때까지 제가 읽었던 그 어느 소설과도 달랐고, 또 재미있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돈을 주고 시집을 산 건 그게 두 번째였다. 점심 시간에 <햄버거>를 읽는 내게 친구가 물었다. “너 미쳤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새끼 천재야.”

그리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발표되었다. 신나서 서점으로 달려갔다. 이미 다 수거된 뒤였다. 이유도 몰랐다. 책방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거 나쁜 책이야. 학생이 읽으면 큰일 나는 책이야” 하고 나를 나무라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지 못했다. 개자식들이 내게서 책을 빼앗았고 아직까지도 돌려주지 않았다.

모 공기업에서 경비원으로 일할 즈음, 장정일 씨는 문화일보에 <삼국지>를 연재했다. 경비원 생활이라는 게 지루함의 연속인데, 삼국지 덕분에 금요일 오후의 10분은 늘 즐거웠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알던 장정일이 아니었다. 장정일이 아닌 다른 누가 썼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그저 ‘삼국지’였다.

일전에 <장정일의 공부>의 독후감을 썼다. 그 책 말미에 ‘대중독재론과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통점’이라는 소단원이 있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그 단원 어디에도 <거짓말>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저 “대중독재, 권력과 국민이 무언의 협정을 맺고 민주주의 체제 내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현상”에 대한 설명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감상을 쓰는 도중에 문득 깨달았다. 장정일은 잊지 않았다.

소설가 장정일을 찌른 칼은 대중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을.

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도쿄! - 공드리의 마음, 까락스의 천재, 봉의 페티시즘

도쿄!

밤늦게 영화를 봤다. 두 편을 연달아서. 뒤에 본 <도쿄!>는 옴니버스 3부작이니까 네 편을 연달아 봤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머리가 복잡할 것 같지만, 전혀! 감기가 심하고 잠도 부족해서 하루 종일 힘들었는데, 객석에 앉은 3시간 동안은 정말, 정말 즐거웠다. 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기도 오랜만이다.

처음엔 이안 감독의 <색, 계>를 볼 생각이었다. 동네 극장에서 철 지난 영화 여러 편을 한 상영관에서 시간별로 나누어 재상영하고 있다. 그런데 늘 바쁜 처제가 모처럼 시간을 내서 놀러 왔는데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결국 <색,계>의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다들 잠자리에 든 뒤에야 늦게 영화관을 향했다.

<색, 계> 대신 고른 작품이 <미쓰 홍당무>. 하하하 즐거운 100분이 지나고 그놈의 ‘라이터’로 달궈진 가슴을 안고, 출구를 나오는 즉시 매표소로 돌아가서 <도쿄!>행 티켓을 끊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도쿄가 배경인 이 옴니버스 3부작은 무척 좋았다. 상영 중엔 몰입해서 몰랐는데, 나갈 때 보니 관객이 나 포함 세 명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금요일 밤인데! 난 정말 좋았는데, 텅 빈 객석이 안타까웠다. 크게 흥행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묻히기에도 아까운 영화다. 분명 좋아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동네방네 알리고 싶어졌다. 이 감상평을 읽고 단 한 분이라도 재미있게 보신다면 나름 보람이 있겠다.

* 스포일러는 (거의) 없음!

인테리어 디자인 - 아키라와 히로코

기교를 부리지 않는 미셸 공드리는 최고다. 도입부는 새벽녘 케이블에서 줄창 틀어대는 일본 에로물인가 하는 의심을 들었다. 일본 여배우 특유의 귀여운 말투도 귀에 거슬리고. 그런데 점점 좋아지더니, 결말은 '심장이 덜컹!'하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가 좋다 싶었던 건, 집을 구하는 두 사람이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아주 긴 테이크부터다. 딱히 이유를 대기는 힘든데, 확 끌렸다. 정서적으로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나 보다. 그 장면 이후로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진행은 다소 투박하다. 한때 천재 소리 듣던 중견 감독의 작품치고는 세련되지 못하다. 근데 그 점이 또 좋다. 매끄럽지 못한 이음새는 몰입을 방해하기는커녕 독특한 리듬감을 만든다. 의도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정말 좋다.

주인공의 변신은, 누구는 이게 뻔한 설정이라고 혹평했지만, 변신 과정의 시각적 충격은 상당하다. 이런 경우, 영화가 소설보다 우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고 내가 떠올렸을 법한 그림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원작은 공드리 감독 여자친구의 만화라고 한다.)

갈등을 해소하지 않고 그냥 끝내버리는 무책임함도 마음에 든다. 다만 다음 편이 곧바로 시작하는 통에 여운을 음미할 만한 시간이 부족했던 점이 아쉽다. 어쩌면 이 단편은 나만의 보물인지도 모른다. 내가 느낀 매력을 다른 분들과 공유할 수 있을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정말, 정말 좋다. (참고로 시네21의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에 별 하나를 주셨고, 어떤 분은 시시하다고, 다른 분은 산만하다고 평하셨다. 쳇!)

그리고 내가 발견한 굉장한 비밀. 히로코 역을 열연한 후지타니 아야코 양이 글쎄, 스티븐 시걸 형님의 딸이라네! 데이트 신청은 목숨 걸고. ^^

후지타니 아야코 양

이 아이가

스티븐 시걸 형님

내 딸이다!

<도쿄!>에 대한 여러분의 평을 찾아보니, 열에 아홉은 <똥>을 최고로 뽑았더라. 확실히 다른 두 편을 압도하는 완성도와 도발적인 상징 구조를 지녔고, 영상미 또한 탁월하다. 드니 라방의 연기, 기가 막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등으로 뽑았다.

순전히 취향의 문제지만, 난 상징이 중심을 차지하는 작품은 별로다. 영화를 보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고, 영화를 보고 나서 되새기는 즐거움이 있는데, 상징이 너무 크게 나서면 첫 번째 즐거움이 방해를 받는다. 나처럼 멀티태스킹이 어려운 사람에겐 버겁다. 나는 객석에 앉은 동안의 정서적 교감을 가장 중시하는 타입의 관객인가 보다.

완성도가 아주 높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보는 중간에 작품의 완성도를 의식하게 되면, 퍼펙트게임을 의식하는 투수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린다. <똥>이 레오 까락스 감독에 대한 기대를 확실하게 채워준 ‘멋진 복귀작’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본 것도 사실이다. 물론 깜찍한(!) 마무리 덕분에 뒷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리고 한 말씀. 드니 라방은 상상 초월이다! 설명하려고 노력할수록 비참한 기분이 드는 명연.

흔들리는 도쿄

난 봉 감독의 팬이 분명하지만, 이 작품은 실망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듯 보인다. 미셸 공드리는 우습게 보시고 까락스는 현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방심하신 걸까. 다른 두 편과 나란히 비교하면 정말 아쉽다.

확실히 초반의 그 아름다운 빛깔은 황홀하다. 남자가 똥 누는 모습까지도 아름다울 만큼. 손끝으로 외로움을 더듬는 듯한 화면은 이와이 슌지보다 달콤하다.

아오이 유우

피자와 카터벨트, 그 감독의 취향.

그런데! 아오이 유우가 등장하면서부터 왜 감독님마저 흔들리시나요! 카터벨트도 낯 간지러운데, 허벅지의 버튼이라뇨! 그냥 아오이 양에게 빨간 옷과 카터벨트를 입히고, 기절시키고, 매끄러운 피부에 그림을 그려 넣고, 한번 눌러보고 싶으셨을 뿐인 거죠?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게다가 그 피자배달 로봇은 너무 창피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 가지 위안은 다케나카 나오토 아저씨의 뜻밖의 출연. 과연 굉장한 존재감이다.

나중에 봉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어 봤는데, 히키코모리에 관한 처음 아이디어는 아주 그럴 듯했다. 그런데 결과는 버튼과 로봇과 마무리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다. 누구가의 말씀처럼 봉테일에게 30분은 너무 짧은 걸까?

추천의 변

영화평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글이지만, 이 글로 단 한 분이라도 흥미를 느껴서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다. 적어도 모두 좋아하는 <똥>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하다. 그리고 혹평 때문에 평소 좋아하던 봉 감독님한테 살짝 미안하지만, 그냥 관객 한 명의 솔직한 감상일 뿐이니, 부디 너그러이. 다음 작품 <마더>, 엄청 기대하고 있다.

공드리, 까락스, 봉

(머리 크기로) 두 거장을 압도하신 봉 감독님.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장정일의 공부 - 인문학 초심자를 위한 맛있는 이유식

소설과 비소설을 통틀어 올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2008년이 두 달 넘게 남았고, 책장에는 아껴둔 기대작이 두어 권 남아있지만, <장정일의 공부>는 ‘키노 선정 올해의 책 2008′의 가장 유력한 후보다.

흥미는 있지만 읽을 마음먹기가 힘들었던 분야의 책들을 요약, 비교, 해설, 비평한 이 친절한 ‘고농축 지식 보충제’는 재미의 질과 양 모두 마음에 쏙 든다.

공부?

예쁜 선홍색 표지가 눈길을 잡아끌었고, 제목을 보자마자 ‘공부? 무슨 공부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우선 그 대답부터 하자면, 이 책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정일 씨가 ‘넓은 의미의 현대사’를 공부하고 정리한 교양인문서다. 재미없을 것 같은 설명이지만, 무척 재미있다. 다른 인문서와 다른 부분은, 우선 서평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의 현실 사회와 밀접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과 연관한 주제의 책들을 요약하고 비평하는 메타북. 또 다른 말로 하면, 주제별로 정리한 <장정일의 독서 일기> 특별판.

인문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어본 분이라면, 저자가 무시무시한 독서광이며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머릿말에서 자신은 “무식하고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곧 “무지의 중용”으로 이어졌다며, 무책임함을 벗고 확실한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한국 사회가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이며,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서야할 위치를 찾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무지의 중용”이라도 취하면 다행이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정치적 주장 가운데 뒷받침할 만한 이론적 토대나 객관적인 사실 정보를 갖춘 것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어느 당파가 좋은 정치를 펼칠 거라고 판단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걸까?

다들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려하지만, 심지어 이 책의 저자도 차마 입에 담지 않지만, 사실 우리 정치의 후진성은 우리의 무지와 무식에 기인한다. 주권자로서 우리의 모자람은 공부를 게을리 한 우리 자신의 책임인 동시에, “대중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정치권력의 흉계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답은 공부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최소한의 (정치적) 판단력을 갖춘 건강한 사회 구성원 양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니까, 당연한 말씀.

우리는 근대성의 포로

책 읽는 재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책의 내용을 간단히, 아주 간단히 소개하자면.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주제는 ‘탈근대’다. 식민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서양 중심의 세계관, 근대화론, 신자유주의 등 만만치 않은 주제의 책들을 너무나 가볍게 잘도 읽어대면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실체에 대한 학문적 해부를 시도한다. 읽다보면, ‘대한민국’이 근대성의 폐단을 골고루 갖춘 표본 같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탈근대를 다루되 이론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런 게 많았다면 아마 난 읽다 말았을지 모른다.) 주로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과 보편적 가치에 기대어 인문학 초심자인 독자의 이해와 흥미를 솜씨 좋게 보살핀다. 이 독후감에 ‘인문학 초심자를 위한 이유식’이라는 부제를 붙인 건 결코 비하가 아니며, 오히려 나 나름의 찬사다. 아는 만큼 재미있는 것이 공부이니, 저자의 세심한 노력은 분명 바라던 대로의 반향을 얻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치즘, 극단에 선 근대성

저자는 나치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나치즘이 주제이거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부서진 손잡이를 움켜쥐고’를 비롯해 전체 23개 장 가운데 6개에 이른다. 지면의 4분의 1을 들인 나치즘 탐구는, 우리의 집단주의적 성향을 감안하면 저자의 우려가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히틀러는 줄곧 박정희에 오버랩된다. 이게 무척 재미있다. 저자는 박정희에 대한 ‘집착’을 숨기지 않으며, 우리의 히틀러가 완전히 무장 해제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기세다. (장정일 씨의 다음 저작이 박정희 분석이라 해도 난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거다.) 진보 진영에서 박정희가 절대악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저자의 이런 태도에는 어떤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을 법한 냄새가 풍긴다.

그 밖의 내용과 나의 관심사

그 밖에 민족주의의 폐해, 잘못 낀 첫 단추 이승만, 또 하나의 제국주의 시오니즘, 조선인 전범, 진보정치의 좌절, 군사문화, 반공주의의 기원, 대중독재 등등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내용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창세기, 시오니즘의 생성-발달 과정, 미 제국의 몰락 등이 아주 흥미진진했으며, 전체주의와 근대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한 사실을 새로 배웠다. 친일에 가려진 조선인 전범과 조선 인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사회의 주류, 국가에 의한 기억 날조 등도 신선한 생각거리를 많이 얻었다.

공부는 독자의 몫

저자의 주장은 선명하지만, 모든 책읽기가 그렇듯 수용할지 말지는 독자 몫이다. 이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나만해도 저자와 다른 생각이 몇 가지 있는데, 나보다 보수적인 독자라면 반감을 품을 만도 하다. 다만 나와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고급 지식이 압축된 좋은 교양서는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며, 나와 다른 주장일수록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또 저자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님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어쩌면 전공자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비판거리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목이 말하듯 저자도 같이 공부하는 입장이다. 이 책은 공부 열심히 하는 옆집 아저씨의 노트라고 보면 좋겠다. 설사 틀린 내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남의 노트는 참고만 할 뿐,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 추측하자면, 저자도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단 좋은 자극을 주고 공부를 권유하는데 더 의미를 두었을 듯싶다.

마지막으로 ‘과두정이 온다’ 장에서 인용한 한 구절을 재인용해본다.

민주주의란 더도 덜도 아닌, 책을 읽는 능력이다.

옥의 티

놀랍게도 비문을 몇 개 발견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종종 눈에 뜨여서, 처음엔 내 무식을 탓했는데, 꼼꼼이 뜯어봤더니, 비문이었다. 주어-술어 관계가 묘한 문장을 두어 개를 찾았고, 따옴표 위치가 애매해서 문장 전체의 의미를 뒤집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저자의 책임이라기 보단 랜덤하우스 편집부의 책임이 크다. 그야말로 옥의 티다.

관련 링크 – 인터뷰 “장정일 – 나는 독서광이 아니다” (북데일리)

장정일의 공부 - 8점
장정일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To Kill A Mockingbird - 열린 마음을 호소하는 따뜻한 성장소설

퓰리처상 수상작이자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인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더 어릴 적에 읽지 못한 게 참 아쉽다.

가장 큰 매력은 정겨운 소설적 경험

이야기가 풍성한 소설이다. 소설 전체의 중심은 인종 문제와 관련한 '톰 로빈슨 사건'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훨씬 이전이다. 작가는 중심 사건에만 집중하지 않고, 대공황 즈음 미국 남부 시골마을 어린 아이의 생활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이웃 아저씨에 대한 괴담, 동네에서 놀며 보낸 시간, 아버지와의 추억, 학교에서 벌어진 소소한 사건 등등. 취향에 따라선 산만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보편적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 개구쟁이 여자아이가 되어 작가가 공들여 만든 소설 속 마을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가 하퍼 리를 남자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다 읽고 보니 여자였다. 소설 내용도 자전적 경험을 바탕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돌아보니, 손에 잡힐 듯한 배경과 정말 있었을 법한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납득되었다. 물론 아무리 자전적 이야기라도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훌륭하게 활자로 재현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펼쳐 놓는 작가의 능력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모든 어른은 한때 어린 아이였다

어린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를 나란히 제시한 점도 좋았다. 교훈적인 작품은 독자의 반감을 사기 십상인데, 저자는 현명하게도 어른들 – 당대의 미국인들 – 에게 직접 훈계하는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식을 취했다. 저자의 ‘계몽적 메시지’는 문학적 가치를 거의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아이들의 두려움의 대상인 미지의 ‘부 래들리’. 흑인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과 잠재적 두려움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는 ‘톰 로빈슨’. 이 둘은 ‘우리 밖의 존재’를 상징한다. 이 ‘문제적 존재’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건 마을의 존경받는 변호사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애티커스. 이 (저자가 생각하는) 미국적 이상(理想)의 화신이 아이들에게 하는 모든 말은, 곧 메이콤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인종차별로 갈등하는 60년대 미국 사회에 전하는 저자의 간곡한 설득이다. 제발 타인과 공감(sympathy)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유달리 ‘우리’가 강한 한국인들도 우리 밖의 존재에 대단히 민감하면서도 자폐적인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 책이 증세 완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문제 제기는 흑백갈등에만 머물지 않고 왜곡된 종교적 신념, 계층 간 갈등, 식민주의, 공교육의 문제점, 이중적인 윤리관 등 ‘닫힌 사회’에 일반적인 병폐들을 망라한다. 1960년에 발표한 소설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2008년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도 뼈가 아플 정도로 유효한 비판이다. 슬프게도 인류는 20세기 후반부터 거의 진보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 에헴,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직접적인 주제 표현은 확실히 비문학적이며, 이 작품의 중대한 단점이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트루먼 카포티는 내 친구

하퍼 리가 이 소설의 진짜 저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일종의 음모론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유일한 소설이다. 데뷔작이자, 대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 외 활동은 에세이 한, 두 편 말고는 거의 없으며, 인터뷰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혀 활동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인데, 문제는 작가가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와 어릴 적부터 친구라는 거다. 이 작품 속의 ‘딜’이 바로 어린 시절의 카포티라고 한다. 집에 카포티의 단편이 실린 단편집이 있길래 문체를 대충 비교해봤는데, 뭐, 그렇다면 그런 것도 같고. 후후.

2005년과 2006년에 개봉한 <카포티 Capote>와 <인페이머스 Infamous>라는 영화에 두 작가의 관계와 이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두 편 다 지루하다는 평이 많아서, 감히 보기 두렵다. 보신 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내용을 살짝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번역본

귀에 익은 제목 ‘앵무새 죽이기’는 명백한 오역이다. mockingbird는 흉내지빠귀이고, 앵무새는 parrot다. 당연히 둘은 엄연한 다른 새이고. 흉내지빠귀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바꿨나 본데, 작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런 짓을 했다면, 이건 뭐, 거의 범죄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이런 식으로 손을 대는 건 모나리자에 수염 그려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목 말고도 예전 번역본에 문제가 많았는지, 새로 번역한 개정판이 2002년 출간되었다. 새 번역은 서강대 영문과의 김욱동 교수라는 분이 했는데, 상당히 잘된 번역본인 것 같다. 우선 mockingbird를 ‘앵무새’라고 오역한 사실을 책머리에 밝힌 점과, 마지막에 연보를 붙여서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구한 점이 마음에 든다. 번역문체도 – 아주 꼼꼼히 보진 않았지만 – 좋은 듯하다. 솔직히 대학 교수님 번역은 성의가 없거나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이 책의 번역은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또 보통 10, 20분 정도 원본과 번역본을 대조해보면 오역 한두 개 쯤은 눈에 뜨이는데, 이 책은 한참을 찾아도 못 찾겠다. ^^;

번역본에 대한 궁금한 몇 가지

그래도 번역을 한 김 교수님을 만난다면 몇 가지 묻고 싶은 점이 있다.

우선, 아버지에 대한 호칭. 아이들이 ‘애티커스’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건 그대로 살리는 편이 좋았을 거 같다. 문화적 차이는 감안해야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건 당시 미국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친구인 딜이 묻기를, 너희는 왜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느냐, 하는데 그건 소설 속 인물에게도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특별한 의도로 만든 설정이라고 봐야 옳다. 애티커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 같은데, 번역본에서는 전부 ‘아빠’로 번역되었다.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잘려나간 사례가 아닐까 싶다. (딜이 아이들에게 묻는 장면을 그대로 인용하고 싶은데, 도무지 못 찾겠다. 찾으면 갱신할 생각이다.)

구글링해보니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있다. 바로 여기.

그리고 아버지 말투도 원문보다 권위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원문에선 아이나 흑인에게도 무척 정중한 반면, 번역본 말투는 교장 선생님 분위기가 풍긴다. 굉장히 민주적인 아버지인데, 훈계조 말투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둘째, 남부 사투리와 흑인 말투를 충청도나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한 점. 앨라배마의 메이콤으로 알고 읽던 중에 갑자기 전남 벌교로 공간이동해버리니, 분위기가 영 어색하다. 원문의 말투 차이를 번역하려고 시도한 점은 좋다. 하지만 우리말 사투리보단 조사를 탈락시키는 등, 고의적인 비문을 만드는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별건 아니지만, 이 소설의 악당인 Mr. Ewell의 발음은 ‘유얼’ 또는 ‘유웰’에 가까울 것 같은데, 번역본에서는 ‘이웰’로 표기했다. 또 동네 이름 Maycomb도 저는 ‘메이쿰’이라고 생각했는데, 번역 표기은 ‘메이콤’이다. 골짜기라는 뜻의 comb(combe)이 ‘쿰’으로 발음되긴 하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가 아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영화는 시시하다

1962년에 영화화 되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인 그레고리 펙이 애티커스 역으로 출연했다. 책을 읽은 직후, 벅찬 가슴을 안고 얼른 영화를 찾아서 봤는데, 기대보다 못했다. 60년대 영화치곤 상당히 세련된 오프닝과 후반부에 부 래들리로 잠깐 나오는 젊은 로버트 듀발만 볼만. 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려니 영 허술한 영웅주의 법정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소설의 감동만 간직하시고 영화는 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인 플래너리 오코너 여사께서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애들 소설’이라고 평하셨다. 문학적으로 세련된 작품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 과하다 싶게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여사님 말씀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내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오코너 여사님 작품보다는 이 소설이다. (나중에 크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신념을 지키는 용기’ 같은 근본적인 미덕을 우선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난아무래도 이 소설만큼 설득력 있게 아이에게 올바름을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애티커스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난 이미 글렀다. (털썩…) 언젠가 아이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책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To Kill a Mockingbird (Mass Market Paperback) - 8점
하퍼 리 지음/Warner Books

2008년 6월 1일 일요일

나의 레종 데트르 - 문화평론가 김갑수의 ‘책은 내 운명’

문화평론가이자 시인, 음악애호가로 잘 알려진 김갑수의 근작 <나의 레종 데트르>.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쓴 예전 글이 황송하게도 알라딘의 ‘이 주의 TTB 리뷰’ 에 선정되면서 받은 적립금으로 구입한 책. 말하자면 공짜 책인데, 알짜를 건졌다.

독서만을 위한 독서

제목과 부제에 드러나듯, 저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책’이라고 선언한다. 평론가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직업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 김갑수에게 독서는 아무런 목적도, 대가도, 이유도 없는, 그저 ‘독서만을 위한 독서’이라는 말씀. 책을 읽으며 느끼는 즐거움이 김갑수의 존재 이유이며, 다른 일은 그 존재 이유를 계속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독서만을 위한 독서는 얼핏 당연하게 들리지만, 실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면 독서엔 늘 이유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과연 즐거움만을 위해서 책을 읽고 있을까? 대체로 아닐 걸? 고백하건데, 지금껏 억지로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은가! 무식을 감추기 위해 흥미 없는 책을 뒤적이는 기분은 얼마나 한심한가! 다들 읽었다기에 뒤쳐진 기분에 억지로 읽은 책도 참 많다. 대부분 시간낭비였다. 그 밖에도 시험 때문에, 취직 때문에, 잘난 척 하려고, 거절하기 힘든 누가 권해서 등등의 이유로 책을 읽은 경험. 나만의 것은 아닐 터이다. 독서를 위한 독서, 쉬운 일이 아니다.

독서만을 위한 독서가 꼭 옳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선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아니, ‘유한계급의 지적 호사’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책에서 얻는 (쾌락 외) 이득을 모조리 배제하고 나면, 독서는 그저 유희일 뿐인데, 유희치고는 지적인 노력과 시간이 꽤 많이 든다. 산업사회의 톱니바퀴로 혹사 당하는 현대인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무척 부러울 따름.

문장가의 독서노트

일견 다독가의 꼼꼼한 독서 노트 같기도 하고, 흔한 일간지 신간 소개 기사 같기도 하고, 지인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는 편지 같기도 하고, 크게 보면 이 허접한 블로그와도 비슷한 듯도 하다. 물론 저자와 이 몸의 내공 차이가 하늘과 땅이니, 비교 자체가 이 책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겠지만.

책장을 넘기면, 저자의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넓디넓은 인문학 지식이 활자에서 묻어난다. 마구 솟아나는 존경심을 ‘응, 비평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하면서 애써 억눌렀다. 다채로운 어휘과 세련된 문장이 감탄스럽다. 다양한 느낌의 문체를 넘나들며,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깔끔한 문장을 인디아나 존스 채찍 휘두르듯 자유자재로 휘두르는데, 이 사람, (거의) 대가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은 기름기 쪽 뺀 단문이지만, 멋을 부린 문장도 김갑수의 문장 정도면 나쁘지 않다.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도 종종 발견했지만, 그건 내 무식 때문이지, 문장 탓은 아니었고.

최고급 구라꾼의 입담에 빠져보시라

어쩌면 난 김갑수의 팬이었는지 모른다. KBS의 <TV, 책을 말하다> 프로를 되는대로 열심히 챙겨 보는데, 그의 발언을 들어보면 정말 ‘최상급 대담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장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저자의 진지하고 부드러운 설득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귀가 쫑긋거리는 걸 막기 힘들다. 이 책의 첫 장 ‘성교’에 나오는 저자의 ‘세련된 테니스 섹스’ 고백이 구라가 아닐 거라는 확신마저 드니, 과연 달변이다. 이 정도의 달변가가 ‘오늘밤 나와 자야하는 이유’를 동서고금의 낭만적인 금언들과 함께 분수처럼 쏟아낸다면, 어떤 여자라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을 듯. 말에 취한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 아래 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누님들이 느끼셨을 그 찹찹함, 저는 이해합니다요.

김갑수의 눈으로 읽기

목차만 본다면, 주제별로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하는 메타북 같다. 저자는 현대 소설, 고전, 시집, 인문학서, 교양서 가릴 것 없이, 모든 종류의 책에 대한 감상과 평을 예의 유려한 문체로 풀어 놓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유익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독후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저자에게 책은 매개일 뿐이다. 어떤 구절을 읽다보면, 저자에게 책은 생각을 자극하는 촉매일 뿐이고 독자는 말없는 구경꾼일 뿐이라는, 소외감마저 든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책과 생각을 주고 받으며, 저자는 자기 ‘사상’을 제법 농도 진한 어조로 독자 앞에 내놓는다. 종종 저자의 주장이 너무 강해서, 그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가질 법도 하다. 나야 대부분 동의하며 읽었지만.

내가 모르는 책들을 누구나 아는 책처럼 마구마구 언급하는 통에, 내 부족한 독서량에 대한 초조감이 들었고, 얼른 읽고 싶어졌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한 평을 읽을 때는 내가 보지 목한 것들을 보는 저자의 박식함과 예리함에 기가 팍팍 죽었지만, 익숙한 책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무척 재미있다. 국내 출판계에 이런저런 연 때문이지, 국내 작가에 대해선 평이 다소 후한 듯 싶지만, 욕이 나올 때는 나오니까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갖춘 평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겠다.

독서에 목마른 당신이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만한 책이다. 저자의 표현을 살짝 따라하자면, ‘책으로 푸는 일등급 구라’정도? “아무튼 읽을 만한 책 없나…”하고 방황하시는 분이라면, 이 블로그 같은 후미진 구석을 헤매실 게 아니라, 당장 동네 책방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 <나의 레종 데트르>를 찾아보시길. 당장 손에 잡히는 책이 없는 사람이라면 보물지도를 발견한 기분이 들 거다.

나의 레종 데트르 - 6점
김갑수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