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일 일요일

거짓말 - 거짓말을 즐기는 법

거짓말

요즘 장정일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중인데, <내게 거짓말을 해봐>은 결국 구하지 못하고, 그 대신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무삭제판을 봤다. 하도 혹평이 많아서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생각보다 좋은 작품이었다.

흥미로운 영화적(문학적) 장치를 잘 갖췄고, 영화 외적으로도 문화운동적 가치가 큰 작품인데, 관객과 평단의 평가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다. 아쉬운 마음에 나 나름의 토를 달아본다. (쓰고 보니 내용 없이 길기만 길다.)


* 주의! 스포일러 있음!

포르노인가?

위키피디아에 실린 포르노그라피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는 이의 성적인 흥분만을 목적하는, 성적 대상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

이 정의에 따르면, 판단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성적 자극만 본 사람이라면 포르노라고 주장할 테고, 성행위 묘사 이면에 숨은 예술적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당연히 포르노가 아니라고 주장할 터이다. 둘 다 맞다. 욕을 하든 감탄을 하든, 그건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며 권리다.

다만, 자기가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직접 보고 판단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 대다수 대중 – 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시건방진 어떤 놈들은 미풍양속이란 초헌법적이고 근거도 없는 잣대를 꼴리는 대로 휘두르며, 우리의 볼 권리를 제한한다. 왜 그 잘난 놈들은 왜 우리를 판단력 없는 바보로만 보는 걸까?

내 관점으로는, 이 영화는 절대로 포르노가 될 수 없다. 성적 자극만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님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포르노 논쟁을 촉발한 점만 봐도 그렇다. 그런 도발은 우리에게 허락된 표현의 자유가 얼만큼인지 측정하려는 용기있는 시도이며, 또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우리의 예술적 경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상기시키려는 노력이다.

왜 섹스인가?

‘소통을 상징하는 섹스’는 아주 흔한 문학적 장치다. 숨김없이 벌거벗은 두 사람이 피부로 서로를 느끼는 행위는 소통을 감각화하는 좋은 방법이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 사이의 정서적 친밀도가 섹스를 기점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떠올리면, 소통으로서의 섹스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섹스로 소통한다는 건 환상일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은유로써 가능하다.)

영화가 주로 제이의 시점이기 때문에, 제이가 와이를 욕망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는 왜 사랑할까? 아마 외롭기 때문일 거다. 가족과 친구가 있는데, 왜 외로울까? 아마 친구, 가족과 나눌 수 없는 무언가를 소통하고자 욕망하기 때문일 거다.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보이고 싶은 마음. 꽁꽁 숨겨둔 열등감과 피해 의식 따위를 위로받고 싶은 마음. 사랑으로 이런 욕망들이 채워질 수 있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마음속 깊이 우린 모두 혼자고 외롭다. 그러나 사랑이라면 마음 속 가장 깊은 방의 문을 열고 진심의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다. 제이와 와이도 그들 나름의 소통을 할 뿐이다.

제이는 가학적 성벽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와도 소통하지 못한다. 가학적 성벽은 혐오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건 아닐 거다. 어떤 심리적 원인이 있을 거고,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 조각가이지만 작품(소통의 매개)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도 결국 같은 문제다. 제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일 수밖에 없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통할 사람이 없다. 그러다가 와이가 나타나, 제이의 본모습을 아무 조건 없이 인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진다. 소통에 굶주린 제이에게 와이는 구원자요, “천사”다.

결국 제이와 와이의 사랑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매’라는 방법만 조금 다를 뿐.

왜 폭력인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우선 ‘일상(제도)적인 폭력에 대한 은유’가 먼저 떠오른다. 단순한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강요’와 ‘문화’라는 형태의 폭력까지 생각하면, 사회생활을 하는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박노자 선생의 <당신들의 대한민국>를 읽어보자.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다.)

폭력의 재생산은 얼마나 흔한가. 내가 받은 폭력을 나보다 약한 녀석에게 고스란히 물려 줄 때의 쾌감. 매에 복종하고 매로 복종시키는 일이 일상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가 사디스트-매저키스트다. 폭력 없이는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 난 수도 없이 많이 봤다. (물론 이 매는 진짜 매일 수도 있고, 어떤 무형의 강제력일 수도 있다.) 어머니-아들, 선생-제자 관계를 흉내 내는 둘의 모습에서 작가의 그런 의도가 비교적 잘 드러난다. 이들의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내 능력 밖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해석을 영화 구석구석에 숨겨두었다. (그러므로 섹스와 폭력을 타자화하고 분석을 시도하는 이 영화는 포르노가 될 수 없다.)

영화 속 폭력은 가짜다. 하지만 우리의 폭력은 진짜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속 폭력은 모두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를 채찍질한 사법부 무뢰배들의 폭력은 진짜 폭력이다. 가공인물의 사랑법에 대해 정색하고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있지도 않은 미풍양속 따위를 들먹이며 다수의 틀 바깥에 선 약자를 괴롭히는 것들은 진짜 사디스트 폭력배들이다.

왜 거짓말인가?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종종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작품 속 인물이 실존 인물이거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을 거란 착각. 작품 속 행위를 현실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필요하다면) 단죄해야 한다는 착각. 이런 착각은 ‘작품과의 거리 두기’를 실패할 경우 발생한다. 착각(또는 몰입)도 작품을 즐기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불륜남을 연기한 배우를 괄시하는 식당 아주머니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구분하려면,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모두 새.빨.간.거.짓.말.

영화 초반 배우들의 인터뷰는 “영화는 다 뻥이다”라는 선언이다. 또, 한참 성관계 중이지만 전혀 발기하지 않은 제이의 성기나 ‘공사’가 다 보이는 와이의 샅, 도저히 각도가 나오지 않는 체위, 어설픈 연기와 대사 처리 등은 ‘영화’를, ‘거짓말’을 보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작가는 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가 다 거짓말일 뿐이며, 가공의 인물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사법적 평가 따위는 웃기는 짓이라고 말한다. 원작자인 장정일이 뭣도 모르는 촌놈들에게 무참하게 얻어터진 일을 떠올리면, 이런 장치는 영리한 보험인 동시에, 꽤 신랄한 조롱이다.

이 밖에도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 나는 ‘위선’이나 ‘소통의 거부’ 등을 떠올렸지만, 문학적 소양이 깊은 분은 더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거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지며 영화를 끝맺음합니다.

아내는 허벅지에 쓰인 ‘내 님’이 누구냐고 물었고,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이와 와이는 누구인가?

작가는 와이의 입을 빌려, 그들의 정체에 대한 노골적인 힌트를 날린다.

나는 백만 인이 싫어.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존중하는 그런 나라가 좋더라.

세련된 방식은 아니지만, 작가는 ‘표현의 자유’ 문제가 결국은 우리의 ‘의식 구조’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포르노라는 단어에만 혹한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이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작가로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도 구분 못 하는 사회를 살아가기는 정말 힘들 거다.

내가 본 제이와 와이는 ‘소수자’다. 누구는 이들을 혐오하지만, 물 밖에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사랑 방식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들은 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옹호할 필요도,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냥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권리를 조용히 존중하면 그만이다.

꼭 제이와 와이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동성애자다. 이들은 장애인이다. 이들은 흑인 아버지를 둔 아이다. 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다. 이들은 비정규직 근로자다. 이들은 철거민이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이다.

지금 우리는 다수의 이름으로 이들을 폭행하며 쾌감을 느끼고 있지 않나?

링크

교환일기 혹은 이야기2 – 이창동 감독, <거짓말>을 보고
성인됨을 상실한 성인남자의 비가, <거짓말>

댓글 2개:

  1. 흠... 오래전 기억이 나는군요.

    영화 속 와이 역으로 분한 남자 배우가 쓴, 일종의 영화 제작일기를 모은 [영화 속 여자를 사랑한 남자](?)라는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재밌는 책이었어요...

    그리고, 불교방송 라디오의 심야 영화음악프로그램을 담당했던 김태연씨를 나름 좋아했지요. 이 영화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말도 들리고.. '포르노필름의 배우'라는 오해에 시달리는 그녀를 픽업한 것이 불교방송이라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한동안 진행하다 그만두더군요. 그녀는 매우 차분하게 진행했었고... 그만 두니 아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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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로 - 2009/09/20 20:39
    영화 때문에 헤어졌다면, 그 남친 참 속 좁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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