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0일 금요일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 홍세화가 만난 열린 마음의 빠리

홍세화 씨의 신문 칼럼을 종종 읽는데,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긴 글을 읽고 싶은 마음에, 대표작 격인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자>을 '이제야' 읽었다. 베스트셀러라면 괜히 미워하는 내 별난 심보 덕분에 초판 발행 후 13년만이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아쉬운 점도 있지만, 생각거리가 많고 재미있는 책이다. 보통의 외국생활 회고담보단 영양가가 훨씬 높다. 피상적인 풍습의 비교에 머무르지 않고, 그 근원인 ‘생각의 틀’을 비교한다. 프랑스의 민주주의 정신과 똘레랑스를 읽다 보면, 우리에게 강요된 생각의 틀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돌아보게 되고,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로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외부 세계와 주고받음이 필수적이다. 해외여행이나 유학도 좋지만, 타인의 경험을 읽는 것도 아주 좋다. 특히 이 책은 ‘나가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의 모범 답안에 가깝다. 20년 이상 관찰한 결과물이므로 일시적인 호감-반감이 아닌, 프랑스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인다.

아쉬운 점은 산만한 구성이다. 아마 출판사 측에서 재미를 배가할 목적으로 내용 순서를 꼬아놓은 듯한데, 덕분에 가벼운 인상만 배가됐다. 시간순서에 따르면서 드문드문 뒤를 돌아보는 구성이었으면, 훨씬 더 감동적이었을 거다. 플래시백 남발은 독자의 집중을 방해할 뿐이다.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쓴 책이니만큼, <홍세화 칼럼>과 같은 밀도 높은 주장은 없지만,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을 엿볼 수 있어서 좋고,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도 많다. 아직까진 홍세화 씨의 존재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이 책이 많이 팔리고 읽혔다는 사실이 반갑다.

침묵하는 민주주의는 없다

읽다 보면 화두를 여럿 발견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
개정판의 136쪽을 보면, 저자가 프랑스인과 말다툼한 일화 한 토막이 실려 있다. 수수료 문제로 현지인 영업사원과 심한 논쟁을 벌인 저자는 “이제 저놈하고 말도 안 섞어!”하고 앙심을 품지만, 다음날 그 프랑스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저자는 그 모습에 당황하고 만다. 이 일화 뒤에 저자가 덧붙인 해설은, 그 프랑스인은 저자의 ‘주장을 반박’했을 뿐이지만, 천생 한국인인 저자는 ‘내 주장을 반박한 그 사람을 미워’했’다는 것이다.

평소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던 터라, 저자의 지적이 통쾌했다. 점점 나아지는 추세라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논쟁의 기술’이 부족하다. 논쟁은 드물고, 언쟁(말싸움)은 너무 흔하다. 논쟁은 논리의 싸움, 주장 vs 주장인 데 반해, 언쟁은 비생산적인 자존심 싸움이고 그 결과는 대개 미움이다. 의견이 다르다는 게 증오의 이유가 되는 사회가 과연 정상일까?

논쟁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넌센스다. 수없이 많은 주장으로 가득 찬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토론과 논쟁은 필수다. 다수결의 논리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다수결 ‘승부’가 민주주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싶다. 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노력 없이, 승자가 권력을 오로지하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 아닌가. 일단 승자가 되면 소수의 의견은 묵살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논쟁 자체를 거부하는데,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독재’일 뿐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우리 스스로 입과 귀를 열어야 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개똥'이다. 원하는 바를 떳떳이,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자. 그리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더라도 미워하지 말자. 이해하고 설득하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링크 – 홍세화의 아름다운 나라, 홍세화 칼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6점
홍세화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009년 1월 4일 일요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수없이 많은 나를 찾아서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처음인데, 익숙하면서 새롭다. 언뜻 8,90년 대 한국소설의 느낌이 나지만, 실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소설이다. 옛 냄새가 살짝 감돌 뿐, 분명 21세기의 소설이다.

꼴랑 단편집과 수필집을 한 권씩 읽고 뭐라고 평하기 남세스럽지만, 이 단편집을 읽으며 "김연수는 진짜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틀림없이 좋은 작가다. 읽는 내내, '즐거움이 솟아나는 샘'을 발견한 흥분과 떨림을 만끽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라도 내가 몰랐다면 발견! ^^)

변신에 능한 초능력 소설가

훌륭한 소설가임은 분명한데, 내 취향인지 확실치 않다. 단편집 전체를 보면 아주 좋은데, 수록된 몇몇 작품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건 아주 좋고, 싫은 건 아주 싫다.

까닭인 즉슨, 작품마다 형식과 분위기와 문체가 굉장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비슷한 시기에 쓴 작품이 맞나 싶을 만큼, 작가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작품이 요구하는 대로 얼굴과 말투를 척척 바꾸는 문장의 달인. 김연수처럼 변신에 능한 작가는 처음이다. 이건 노력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처럼 느껴진다. 마치 초능력처럼.

최고급 단편, 아름다운 시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뿌넝숴(不能設)>, <거짓된 마음의 역사>, <남원고사>, <이렇게 한낮 속에 서있다> 들이다. 형식과 내용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단편이다. 아름다운 문장, 참신한 소재, 재미있는 서사, 실험적 형식 등 장점이 가득하다. 누가 한국 단편문학의 현주소를 묻는다면, 당당히 이 단편집을 내놓으리라. 난 영미권 단편을 굉장히 좋아하고, 우리 작가들의 단편은 살짝 시시하게 여겼는데, 위의 작품들을 읽고는 생각을 싹 바꿨다. 우리의 단편문학은 정말 '진보'하고 있다.

김연수 표 '문장'은 문장에 정신 팔려 책읽기를 잊을 만큼 미문(美文)이다. 누구는 "김연수 글은 잘 안 읽혀!"라고 불평하시는데, 당연한 말씀! 김연수의 문장은 그대로 시(詩)인데, 시를 속독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문장마다 가득한 시적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릴 수밖에. 공들인 문장을 읽을 땐 독자도 공을 들일 의무가 있다.

그런데! 내 상상 속 김연수는, 문장을 골백 번 가다듬는, 따라서 작품수가 적은 '은둔하는 장인형 작가'였는데, 의외로 작품수가 많은 편이라 놀랐다. 어쩌면 그냥 쓰면 이런 문장이 줄줄 나오는 지도 모른다. 으음, 그건 좀 반칙인데.

감상주의는 싫다

이제 싫은 부분을 말해보자.

첫 작품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은 솔직히 지루하고 짜증스럽다. 행동은 없고 생각만 있는 '옛날' 한국소설을 그대로 닮았다. 그 다음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는 화자의 위치가 재미있긴 하지만 지루하긴 마찬가지.

맨 처음 실린 작품이 이렇게 재미없는 건 문제다. 첫 작품이 <...농담>이 아니었다면, 만 부 정도는 더 팔리지 않았을까? 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분이 이 시시한 첫 작품을 읽고서도, 과연 이 책을 샀을까? 나라면 안 샀을 거다. 그 덕에 뒤에 실린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는 작품들을 즐길 기회를 놓치고 말았겠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특히 공 들인 작품 냄새가 난다. 어떤 말을 하려는 지는 대충 짐작가지만, 감응하긴 어렵다. 그건 아마 작가와 나의 '세대 차이' 때문인 듯. 작가는 나보다 10살 정도 윗세대인데, 그 세대의 감수성이란 게 내겐 간혹 촌스럽게 느껴진다. 내 어린 시절을 그 세대인 사촌형과 한 방에서 보낸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관찰자 입장에서 낱낱이 들여다봤으니까. (지금 막 다 읽은 작가의 수필집 <청춘의 문장들>의 독후감을 쓰게 된다면, 그때 이 얘기를 더 해보련다.)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은 익살스러운 문체가 재미있긴 한데, 이야기 자체는 별 재미가 없다. 꽤 매력적이고 뻔뻔男인 주인공의 활약상이 조금 더 펼쳐졌다면 재미있는 액션 시대극이 나왔을 거 같은데.

이 작품들이 싫은 이유는 '감상주의' 때문이다. 작가는 틈날 때마다 내면으로 침잠하려고 한다. 그리고 공감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내가 읽고픈 건 감정이 아닌 행동이다. 행동으로 감정을 미루어 짐작하는 재미를 즐기고 싶은 거다. 감정을 시시콜콜 나열하는 건 잔소리처럼 들린다. 잔소리는 재미없다.

예를 들어, 편지 형식인 <거짓된 마음의 역사>은, 감정의 묘사가 전혀 없지만 화자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진다. 반면, <...농담>이나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경우,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 붓지만 오히려 감정이입이 어렵다.

난 김연수 씨처럼 훌륭한 작가가 더욱 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기를 바라는데, 작가는 어느 선에서 스스로 담을 쌓는다. 나처럼 마음은 메마르고 머리는 돌대가리인 독자와는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그건 정말 아쉽다. 그럴 거 같진 않지만, 만약 이런 재능을 지닌 작가가 "선수끼리 돌려 있는" 소설을 쓴다면 난 정말 크게 실망할 거다.

‘나’는 누구인가

실험적 요소가 여럿 눈에 띄는데, 그중 '화자(話者) 알아맞추기'가 재밌다.

이야기는 다짜고짜 ‘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독자는 어리둥절. 초조한 마음으로 문장 속으로 몰입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독자는 그 나름의 ‘나’를 필사적으로 떠올린다. 드디어 ‘나’의 몽타주를 완성한 독자가 불안감을 떨치고 슬슬 이야기를 즐기는 순간! 작가는 독자의 상상을 배신하는 뜻밖의 ‘나’를 드러낸다. 때론 “뭐야!”하고 살짝 화도 나지만, 이런 사기는 너무나 즐겁다.

소설 속 ‘나’를 상상하다보면, 오히려 독자의 머릿속 구조가 드러난다. 이런저런 편견에 사로잡힌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작품마다 전면에 나선 ‘나’는,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저마다의 진실’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애초에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 ‘나’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에겐 나의 진실이, 당신에겐 당신의 진실이 있다. 진실/거짓의 구분이 흐트러지면, 문학의 중요한 역할인 ‘공감’의 폭이 확장된다. 덕분에 이 단편집의 재미는 한층 더 깊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권말에서 작가는 이 단편집이 독서의 결과라고 말한다. 다른 책을 읽고 난 뒤, 그 내용을 토양으로 자라난 이야기란 말씀. 그 책들의 목록은 밝히지 않았지만, 이 작품집의 패러디적 성격과 상호 텍스트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남원고사>는 그야말로 단적인 예.)

또, 작가와 화자를 분명히 구분한 점도 재미있다. 작가 자신이 아닌, 수많은 ‘나’의 존재가 이 단편집의 특징인데, 액자구조의 변형으로 보면 맞을 것 같다.

이 두 특징을 보면, 탈근대주의, 소위 포스트모던 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될 것 같다. 드러내진 않지만, 작가 스스로도 문학 이론에 해박한 것이 분명하고, 탈근대 문학에 호응하는 듯한 태도도 엿보인다.

그런데 권말 평론을 쓰신 문학평론가 김병익 씨는 이 작품의 탈근대성을 극구 부인한다. 그분은 이 작품집을 전통적 한국소설의 연장으로 보는데, 그건 <...농담>이나 <...설산>에 국한된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 외 작품들은 내가 보기엔 정말 새로운데, 전문가의 눈에는 아무래도 다른 듯. 뭐, 그것도 좋다! 사실 내게 정말 중요한 건 내 취향이다. 나는 평론가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니고, 다만 책 좋아하는 한가한 아저씨일 뿐이니까.

그리고

아무튼 난 김연수 작가의 (아직은 조금 의심이 남은) 팬이 됐고, 사랑하는 알라딘에서는 작가의 친필 서명이 담긴 신간 <밤은 노래한다>를 보내주신단다. 아아,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알고 보니 작가는 꽤나 활동적인 블로거다. 왠지 모를 섭섭한 기분. 남 몰래 연모하던 책방 아가씨, 알고 보니 애 딸린 유부녀. 뭐, 그런 기분.

링크 – THE ARCHIVIST Completed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8점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