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8일 일요일

영화 리뷰 쓰기 - 영화 블로깅의 101

이 책의 저자인 영화평론가 김봉석 씨의 정의에 따르면, 리뷰는 글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함께 영화를 다시(re) 보는(view) 경험이며, 감상문과 평론 중간 수준의 짧은 비평이자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가치 판단을 하려 할 때 쓰는 글"이다. 평론처럼 전문적일 필요는 없기에, 누가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 ‘어떻게’가 바로 이 책의 주제다.

149쪽에 불과한 적은 분량이고 활자도 크기 때문에, 1~2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짧고 실용적인 내용인지라 덧붙일 말이 많진 않은데, 영화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 소갯글을 남긴다.

체계적 이론이나 대단한 비결이 담긴 건 아니지만, 친절하고 무척 실용적인 책이다. (나를 비롯해) 읽을 만한 영화평을 쓰고자 하는 분들에겐 꽤 좋은 지침서가 될 만하다.

뒤표지에 요약된 저자의 팁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인상적인 대사, 장면에서 시작하라
  • 결말은 더욱 인상적으로, 시작과 끝이 좋으면 다 좋다
  • 짧은 글에서는 하나의 주제만 파고들어라
  • 내러티브를 분석하라. 단 내러티브 분석은 내용 설명이 아니다
  • 인상적인 대사나 장면을 구체적으로 인용하라
  • 영화사적 관점에서 분석하라 – 장르의 역사를 꿰뚫어라
  • 형식의 분석 – 형식은 테크닉이 아니다

등등.

리뷰 읽고 쓰는 건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즐기는 한 방법이다. 모든 관객이 리뷰어가 될 필요는 없지만, 영화 한 편 만드는 데 드는 재능과 노력과 시간과 자원을 생각하면, 좋은 영화를 딱 한 번 보고 마는 건 죄악 아닐까.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영화 리뷰 쓰기 - 6점
김봉석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2009년 6월 14일 일요일

김지운의 숏컷 - 영화광/영화감독의 일기

<감독, 열정을 말하다>를 읽고, 김지운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의 글과 인터뷰를 읽다보면 호감을 넘어 묘한 동질감까지 느낀다.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보니, 늘 신뢰할 만한 영화감독이며 좋은 예술가인데, 한편으론 어딘지 소심하고 약간 찌질한 분위기가 풍기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미가 있다고 할까. 실제 사람됨이야 알 수 없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귀엽게 엉뚱한 천재?  ^^

작품마다 신선한 예술가적 감각이 돋보이지만, 때론 거리낌 없이 통속적인 점이 좋다. 딱히 정해진 스타일이 있다기보단 두루두루 능한 점도 독특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장르를 빌려오지만, 결과물은 늘 한국영화의 질을 한 단계 올려놓는 훌륭한 작품이다. 제도화된 영화수업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장인과 같은 능숙함을 자랑하고, 폭넓은 관객과 소통하면서도 적지 않은 마니아를 거느린 이상한 감독이다. 이런 감독의 작품을 자막 없이 볼 수 있단 건 분명 행운이다.

이 책 <김지운의 숏컷>은 <박찬욱의 몽타주>, <류승완의 본색>과 형제다. <본색>은 아직 못 봤지만, <몽타주>와는 매우 비슷하다. 데뷔기, 예술관, 작품 제작기, 추천 작품, 신변잡기 등으로 이뤄진 구성이 약간 산만하긴 하지만 영화팬이라면 즐겁게 읽을 만하다. 감독의 팬에겐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일 테고.

<숏컷>과 <몽타주>를 비교하면, 솔직히 재미는 <몽타주>가 낫다. 일단 밀도가 조금 더 높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의뭉스러움이 곳곳에 묻어나는 데다가, 좋은 영화평도 함께 실려 있으니까. 그에 반해, <숏컷>의 미덕이라면, 베테랑 영화광의 메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영화광의 자세를 한수 배울 수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김 감독님이 추천하는 작품 목록은 나처럼 고립된 영화팬에겐 귀중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그 중 꼭 보고싶은 몇 편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스즈키 세이준 – 지고이네르바이젠, 유메지, 육체의 문, 켄카 엘레지, 살인의 낙인
  • 와카마츠 코지 – 태아가 밀렵될 때
  • 미이케 타케시 – 오디션
  • 아녜스 바르다 – 행복
  • 존 카사베츠 – 얼굴들
  • 라디슬라스 스트레비치 – 마스코트
  • 대런 아로노프스키 – 레퀴엠, 파이
  • 크리스 스미스 – 아메리칸 무비
  • 페드로 알모도바르 – 그녀에게
  • 필 조아누 – U2, 래틀 앤드 험
  • 서극 – 순류역류
  • 찰스 로튼 – 사냥꾼의 밤
  • 브라이언 드 팔마 – 자매들
  • 두산 마카베예프 – 스위트 무비
  • 토드 솔론즈 – 해피니스

크게 의식하진 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난 김지운 감독 작품을 다 좋아했다. 제일 좋은 건 <달콤한 인생>. 극장에서 두 번, 케이블로는 띄엄띄엄이지만 네다섯 번을 본 거 같다. 이 책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그의 영화는 서사보다 ‘인상’이 앞서는데, 그런 점이 내 취향과 맞는 부분이 있다.

<인생>은 씬마다 다 좋지만, 특히 선우(이병헌)가 소파에 누워 스탠드를 껐다 켰다 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옹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살짝 비슷한 장면이 나오기에 거기서 가져왔나 싶었데, 알고보니 김지운 감독님의 버릇이란다. 중년남에겐 너무 처량한...

김지운의 숏컷 - 6점
김지운 지음/마음산책

2009년 6월 9일 화요일

감독, 열정을 말하다 - 예술가는 입으로 말한다

인터뷰 기사를 참 좋아하는데, 당분간은 안 읽어도 되겠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 씨의 역작 <감독, 열정을 말하다> 때문이다. 자그마치 440쪽 분량의 ‘마라톤 인터뷰집’을 사나흘 연속 읽다 보니, 내가 인터뷰한 것도 아닌데, ‘인터뷰 피로 증상’이 온다. 아, 완전 수다쟁이들. 봉준호 감독 편은 100쪽이 넘는데, 아아, 누가 말했던가,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그거 다 뻥이다.

2006년 나온 책이니까, 조금 옛날이야기이긴 한데, 영화팬이라면 귀가 솔깃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동료 감독들과 얽히고 설키는 영화판 뒷이야기와 영화 제작 과정, 감독이 본 배우, 영화평에 대한 평 등은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한미 FTA와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가 주관심사인데, 영화인들이 노무현 대통령에서 품었던 기대와 실망, 배신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슬쩍슬쩍 드러나는 감독들의 딜레마다. 정치적으론 좌파지만, 영화판에선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최상위 계급이며, 약자인 스탭들의 노동력 착취를 방관 혹은 묵인하는 처지. 거대자본 없인 존재할 수 없는 운명. 황금알을 낳지 못하면 내일이라도 매장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직접 언급은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 한켠에 머문다.

그밖에 드문드문 영화판 내외 인물들에 대한 꽤나 직설적 발언 등은 영화잡지에서는 보기 힘든 내용이다.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감독들의 모습은 내 상상과 꽤나 다른 뿐더러, 상당히 다면적이고 또 인간적이다. 인터뷰이의 사람다운 모습과 인터뷰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지면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진대, 이 책의 인터뷰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앉은 듯 생생하다. 솔직한 활자화라고 할까? 편집하는 입장에선 예쁘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 유혹이 컸을 텐데, 이만큼 꾸밈없는 책을 낸 뚝심이 대단하다. 덕분에 독자에겐 무척 시원하고, 감독님들은 나중에 조금 후회했을지 모를 책이 되었다.

이름값 때문인지 김지운, 류승완, 변영주, 봉준호 편이 재미있었는데, 최고는 단연 봉준호 감독이다. 내 상상대로 과연 총명하고 재미있고 약간 변태인데, 그 정도가 모두 내 상상 이상이다. (우리 동네 아는 형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설명하긴 좀 어렵지만, 봉 감독님 특유의 “헛헛”하는 웃음소리가 답변마다 배어있고, 이따금 박장대소할 만한 개그라인이 나온다. 다른 감독 편은 몰라도, 봉 감독 편만은 강추다!

이 책은 <영화, 감독을 말하다>라는 속편이 있다. 속편에는 지승호 씨가 오매불망 바라던 박찬욱 감독님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역시 재미있다. ^^

2009년 6월 3일 수요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촌평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 감독에 대한 호감 분포가 이상하리만큼 광범위한 이유가 궁금했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내로라하는 평론가와 감독들이 하나같이 ‘엄지 업!’을 하는 걸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을 본 까닭은 그렇다.

스포일러 없는 짧은 감상을 남겨본다.

재밌게 보긴 봤는데, 솔직히 영화적으로 – 그러니까 기술적으로 – 대단해 보이진 않는다. 툭툭 던지는 듯한 이야기 흐름과 낮고 정직한 시선이 좋긴 한데, 별 5개는 과한 평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클리셰에서 자유로운 점은 마음에 들지만, 그래도 별 4개 이상을 주긴 힘들다. (솔직히 요즘 내가 좋아하는 류의 영화는 아니다. 요즘은 적당히 기교를 부리는 영화가 좋더라.)

영화관에서 보면, 감상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황량한 아일랜드의 언덕을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장면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뭉클하다. 큰 화면에, 소리 좋은 영화관에서 제대로 봤다면, 확실히 전체적 인상이 크게 달랐을 듯. 예를 들어, 데미안이 ‘배신자’들을 처형하는 장면은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는데,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거친 숨소리, 넓게 펼쳐진 스산한 황무지 언덕을 제대로 느꼈더라면 그 울림이 30배는 더 크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 아닐까 싶다. 영화기술적으로는 화려하지 않지만,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간단치 않은 소재를 낮은 눈높이에서 섬세하게 그린 점이 좋은 평가의 이유인 듯싶다. ‘가해자’인 영국을 인정사정 까는 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어설프게 식민 지배의 이로움을 중얼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개봉 후 영국에서 역사적 사실 관계에 대한 말이 많았고, 로치 감독은 배신자 소리도 들었다.)

아일랜드 독립 투쟁과 독립 이후 분열은 당연히 우리의 독립 과정과 겹쳐 보인다. 어쩌면 그 때문에 오히려 이 영화에 대한 감흥이 덜 한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이야기니까.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 어이 없고 부끄러운 일이라면 누구 못지 않게 많이 겪은 게 바로 우리니까. 그렇지만 우리말이 게일어처럼 애국을 상징하는 ‘박제’가 되지 않은 것만은 참 다행이다.

링크

한가할 때 읽어볼 만한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