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4일 일요일

김지운의 숏컷 - 영화광/영화감독의 일기

<감독, 열정을 말하다>를 읽고, 김지운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의 글과 인터뷰를 읽다보면 호감을 넘어 묘한 동질감까지 느낀다.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보니, 늘 신뢰할 만한 영화감독이며 좋은 예술가인데, 한편으론 어딘지 소심하고 약간 찌질한 분위기가 풍기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미가 있다고 할까. 실제 사람됨이야 알 수 없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귀엽게 엉뚱한 천재?  ^^

작품마다 신선한 예술가적 감각이 돋보이지만, 때론 거리낌 없이 통속적인 점이 좋다. 딱히 정해진 스타일이 있다기보단 두루두루 능한 점도 독특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장르를 빌려오지만, 결과물은 늘 한국영화의 질을 한 단계 올려놓는 훌륭한 작품이다. 제도화된 영화수업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장인과 같은 능숙함을 자랑하고, 폭넓은 관객과 소통하면서도 적지 않은 마니아를 거느린 이상한 감독이다. 이런 감독의 작품을 자막 없이 볼 수 있단 건 분명 행운이다.

이 책 <김지운의 숏컷>은 <박찬욱의 몽타주>, <류승완의 본색>과 형제다. <본색>은 아직 못 봤지만, <몽타주>와는 매우 비슷하다. 데뷔기, 예술관, 작품 제작기, 추천 작품, 신변잡기 등으로 이뤄진 구성이 약간 산만하긴 하지만 영화팬이라면 즐겁게 읽을 만하다. 감독의 팬에겐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일 테고.

<숏컷>과 <몽타주>를 비교하면, 솔직히 재미는 <몽타주>가 낫다. 일단 밀도가 조금 더 높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의뭉스러움이 곳곳에 묻어나는 데다가, 좋은 영화평도 함께 실려 있으니까. 그에 반해, <숏컷>의 미덕이라면, 베테랑 영화광의 메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영화광의 자세를 한수 배울 수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김 감독님이 추천하는 작품 목록은 나처럼 고립된 영화팬에겐 귀중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그 중 꼭 보고싶은 몇 편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 스즈키 세이준 – 지고이네르바이젠, 유메지, 육체의 문, 켄카 엘레지, 살인의 낙인
  • 와카마츠 코지 – 태아가 밀렵될 때
  • 미이케 타케시 – 오디션
  • 아녜스 바르다 – 행복
  • 존 카사베츠 – 얼굴들
  • 라디슬라스 스트레비치 – 마스코트
  • 대런 아로노프스키 – 레퀴엠, 파이
  • 크리스 스미스 – 아메리칸 무비
  • 페드로 알모도바르 – 그녀에게
  • 필 조아누 – U2, 래틀 앤드 험
  • 서극 – 순류역류
  • 찰스 로튼 – 사냥꾼의 밤
  • 브라이언 드 팔마 – 자매들
  • 두산 마카베예프 – 스위트 무비
  • 토드 솔론즈 – 해피니스

크게 의식하진 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난 김지운 감독 작품을 다 좋아했다. 제일 좋은 건 <달콤한 인생>. 극장에서 두 번, 케이블로는 띄엄띄엄이지만 네다섯 번을 본 거 같다. 이 책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그의 영화는 서사보다 ‘인상’이 앞서는데, 그런 점이 내 취향과 맞는 부분이 있다.

<인생>은 씬마다 다 좋지만, 특히 선우(이병헌)가 소파에 누워 스탠드를 껐다 켰다 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옹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살짝 비슷한 장면이 나오기에 거기서 가져왔나 싶었데, 알고보니 김지운 감독님의 버릇이란다. 중년남에겐 너무 처량한...

김지운의 숏컷 - 6점
김지운 지음/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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