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9일 화요일

감독, 열정을 말하다 - 예술가는 입으로 말한다

인터뷰 기사를 참 좋아하는데, 당분간은 안 읽어도 되겠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 씨의 역작 <감독, 열정을 말하다> 때문이다. 자그마치 440쪽 분량의 ‘마라톤 인터뷰집’을 사나흘 연속 읽다 보니, 내가 인터뷰한 것도 아닌데, ‘인터뷰 피로 증상’이 온다. 아, 완전 수다쟁이들. 봉준호 감독 편은 100쪽이 넘는데, 아아, 누가 말했던가,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그거 다 뻥이다.

2006년 나온 책이니까, 조금 옛날이야기이긴 한데, 영화팬이라면 귀가 솔깃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동료 감독들과 얽히고 설키는 영화판 뒷이야기와 영화 제작 과정, 감독이 본 배우, 영화평에 대한 평 등은 몇 번을 읽어도 재미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한미 FTA와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가 주관심사인데, 영화인들이 노무현 대통령에서 품었던 기대와 실망, 배신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슬쩍슬쩍 드러나는 감독들의 딜레마다. 정치적으론 좌파지만, 영화판에선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최상위 계급이며, 약자인 스탭들의 노동력 착취를 방관 혹은 묵인하는 처지. 거대자본 없인 존재할 수 없는 운명. 황금알을 낳지 못하면 내일이라도 매장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직접 언급은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 한켠에 머문다.

그밖에 드문드문 영화판 내외 인물들에 대한 꽤나 직설적 발언 등은 영화잡지에서는 보기 힘든 내용이다.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감독들의 모습은 내 상상과 꽤나 다른 뿐더러, 상당히 다면적이고 또 인간적이다. 인터뷰이의 사람다운 모습과 인터뷰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지면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을진대, 이 책의 인터뷰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앉은 듯 생생하다. 솔직한 활자화라고 할까? 편집하는 입장에선 예쁘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 유혹이 컸을 텐데, 이만큼 꾸밈없는 책을 낸 뚝심이 대단하다. 덕분에 독자에겐 무척 시원하고, 감독님들은 나중에 조금 후회했을지 모를 책이 되었다.

이름값 때문인지 김지운, 류승완, 변영주, 봉준호 편이 재미있었는데, 최고는 단연 봉준호 감독이다. 내 상상대로 과연 총명하고 재미있고 약간 변태인데, 그 정도가 모두 내 상상 이상이다. (우리 동네 아는 형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설명하긴 좀 어렵지만, 봉 감독님 특유의 “헛헛”하는 웃음소리가 답변마다 배어있고, 이따금 박장대소할 만한 개그라인이 나온다. 다른 감독 편은 몰라도, 봉 감독 편만은 강추다!

이 책은 <영화, 감독을 말하다>라는 속편이 있다. 속편에는 지승호 씨가 오매불망 바라던 박찬욱 감독님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역시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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