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7일 화요일

To Kill A Mockingbird - 열린 마음을 호소하는 따뜻한 성장소설

퓰리처상 수상작이자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인 <To Kill a Mockingbird>를 읽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더 어릴 적에 읽지 못한 게 참 아쉽다.

가장 큰 매력은 정겨운 소설적 경험

이야기가 풍성한 소설이다. 소설 전체의 중심은 인종 문제와 관련한 '톰 로빈슨 사건'이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훨씬 이전이다. 작가는 중심 사건에만 집중하지 않고, 대공황 즈음 미국 남부 시골마을 어린 아이의 생활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이웃 아저씨에 대한 괴담, 동네에서 놀며 보낸 시간, 아버지와의 추억, 학교에서 벌어진 소소한 사건 등등. 취향에 따라선 산만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보편적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이 있다. 개구쟁이 여자아이가 되어 작가가 공들여 만든 소설 속 마을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가 하퍼 리를 남자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다 읽고 보니 여자였다. 소설 내용도 자전적 경험을 바탕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돌아보니, 손에 잡힐 듯한 배경과 정말 있었을 법한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납득되었다. 물론 아무리 자전적 이야기라도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훌륭하게 활자로 재현하여 독자의 머릿속에 펼쳐 놓는 작가의 능력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모든 어른은 한때 어린 아이였다

어린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를 나란히 제시한 점도 좋았다. 교훈적인 작품은 독자의 반감을 사기 십상인데, 저자는 현명하게도 어른들 – 당대의 미국인들 – 에게 직접 훈계하는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식을 취했다. 저자의 ‘계몽적 메시지’는 문학적 가치를 거의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아이들의 두려움의 대상인 미지의 ‘부 래들리’. 흑인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과 잠재적 두려움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는 ‘톰 로빈슨’. 이 둘은 ‘우리 밖의 존재’를 상징한다. 이 ‘문제적 존재’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건 마을의 존경받는 변호사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애티커스. 이 (저자가 생각하는) 미국적 이상(理想)의 화신이 아이들에게 하는 모든 말은, 곧 메이콤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인종차별로 갈등하는 60년대 미국 사회에 전하는 저자의 간곡한 설득이다. 제발 타인과 공감(sympathy)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유달리 ‘우리’가 강한 한국인들도 우리 밖의 존재에 대단히 민감하면서도 자폐적인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 책이 증세 완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문제 제기는 흑백갈등에만 머물지 않고 왜곡된 종교적 신념, 계층 간 갈등, 식민주의, 공교육의 문제점, 이중적인 윤리관 등 ‘닫힌 사회’에 일반적인 병폐들을 망라한다. 1960년에 발표한 소설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2008년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도 뼈가 아플 정도로 유효한 비판이다. 슬프게도 인류는 20세기 후반부터 거의 진보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 에헴, 등장인물의 입을 빌린 직접적인 주제 표현은 확실히 비문학적이며, 이 작품의 중대한 단점이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트루먼 카포티는 내 친구

하퍼 리가 이 소설의 진짜 저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일종의 음모론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유일한 소설이다. 데뷔작이자, 대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 외 활동은 에세이 한, 두 편 말고는 거의 없으며, 인터뷰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혀 활동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인데, 문제는 작가가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와 어릴 적부터 친구라는 거다. 이 작품 속의 ‘딜’이 바로 어린 시절의 카포티라고 한다. 집에 카포티의 단편이 실린 단편집이 있길래 문체를 대충 비교해봤는데, 뭐, 그렇다면 그런 것도 같고. 후후.

2005년과 2006년에 개봉한 <카포티 Capote>와 <인페이머스 Infamous>라는 영화에 두 작가의 관계와 이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두 편 다 지루하다는 평이 많아서, 감히 보기 두렵다. 보신 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내용을 살짝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번역본

귀에 익은 제목 ‘앵무새 죽이기’는 명백한 오역이다. mockingbird는 흉내지빠귀이고, 앵무새는 parrot다. 당연히 둘은 엄연한 다른 새이고. 흉내지빠귀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바꿨나 본데, 작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런 짓을 했다면, 이건 뭐, 거의 범죄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이런 식으로 손을 대는 건 모나리자에 수염 그려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목 말고도 예전 번역본에 문제가 많았는지, 새로 번역한 개정판이 2002년 출간되었다. 새 번역은 서강대 영문과의 김욱동 교수라는 분이 했는데, 상당히 잘된 번역본인 것 같다. 우선 mockingbird를 ‘앵무새’라고 오역한 사실을 책머리에 밝힌 점과, 마지막에 연보를 붙여서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구한 점이 마음에 든다. 번역문체도 – 아주 꼼꼼히 보진 않았지만 – 좋은 듯하다. 솔직히 대학 교수님 번역은 성의가 없거나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이 책의 번역은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또 보통 10, 20분 정도 원본과 번역본을 대조해보면 오역 한두 개 쯤은 눈에 뜨이는데, 이 책은 한참을 찾아도 못 찾겠다. ^^;

번역본에 대한 궁금한 몇 가지

그래도 번역을 한 김 교수님을 만난다면 몇 가지 묻고 싶은 점이 있다.

우선, 아버지에 대한 호칭. 아이들이 ‘애티커스’라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는 건 그대로 살리는 편이 좋았을 거 같다. 문화적 차이는 감안해야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건 당시 미국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친구인 딜이 묻기를, 너희는 왜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느냐, 하는데 그건 소설 속 인물에게도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특별한 의도로 만든 설정이라고 봐야 옳다. 애티커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 같은데, 번역본에서는 전부 ‘아빠’로 번역되었다.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잘려나간 사례가 아닐까 싶다. (딜이 아이들에게 묻는 장면을 그대로 인용하고 싶은데, 도무지 못 찾겠다. 찾으면 갱신할 생각이다.)

구글링해보니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있다. 바로 여기.

그리고 아버지 말투도 원문보다 권위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원문에선 아이나 흑인에게도 무척 정중한 반면, 번역본 말투는 교장 선생님 분위기가 풍긴다. 굉장히 민주적인 아버지인데, 훈계조 말투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둘째, 남부 사투리와 흑인 말투를 충청도나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한 점. 앨라배마의 메이콤으로 알고 읽던 중에 갑자기 전남 벌교로 공간이동해버리니, 분위기가 영 어색하다. 원문의 말투 차이를 번역하려고 시도한 점은 좋다. 하지만 우리말 사투리보단 조사를 탈락시키는 등, 고의적인 비문을 만드는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별건 아니지만, 이 소설의 악당인 Mr. Ewell의 발음은 ‘유얼’ 또는 ‘유웰’에 가까울 것 같은데, 번역본에서는 ‘이웰’로 표기했다. 또 동네 이름 Maycomb도 저는 ‘메이쿰’이라고 생각했는데, 번역 표기은 ‘메이콤’이다. 골짜기라는 뜻의 comb(combe)이 ‘쿰’으로 발음되긴 하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가 아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영화는 시시하다

1962년에 영화화 되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인 그레고리 펙이 애티커스 역으로 출연했다. 책을 읽은 직후, 벅찬 가슴을 안고 얼른 영화를 찾아서 봤는데, 기대보다 못했다. 60년대 영화치곤 상당히 세련된 오프닝과 후반부에 부 래들리로 잠깐 나오는 젊은 로버트 듀발만 볼만. 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려니 영 허술한 영웅주의 법정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소설의 감동만 간직하시고 영화는 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인 플래너리 오코너 여사께서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애들 소설’이라고 평하셨다. 문학적으로 세련된 작품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 과하다 싶게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여사님 말씀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내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오코너 여사님 작품보다는 이 소설이다. (나중에 크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신념을 지키는 용기’ 같은 근본적인 미덕을 우선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난아무래도 이 소설만큼 설득력 있게 아이에게 올바름을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애티커스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난 이미 글렀다. (털썩…) 언젠가 아이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책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To Kill a Mockingbird (Mass Market Paperback) - 8점
하퍼 리 지음/Warner Book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