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도쿄! - 공드리의 마음, 까락스의 천재, 봉의 페티시즘

도쿄!

밤늦게 영화를 봤다. 두 편을 연달아서. 뒤에 본 <도쿄!>는 옴니버스 3부작이니까 네 편을 연달아 봤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머리가 복잡할 것 같지만, 전혀! 감기가 심하고 잠도 부족해서 하루 종일 힘들었는데, 객석에 앉은 3시간 동안은 정말, 정말 즐거웠다. 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기도 오랜만이다.

처음엔 이안 감독의 <색, 계>를 볼 생각이었다. 동네 극장에서 철 지난 영화 여러 편을 한 상영관에서 시간별로 나누어 재상영하고 있다. 그런데 늘 바쁜 처제가 모처럼 시간을 내서 놀러 왔는데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결국 <색,계>의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다들 잠자리에 든 뒤에야 늦게 영화관을 향했다.

<색, 계> 대신 고른 작품이 <미쓰 홍당무>. 하하하 즐거운 100분이 지나고 그놈의 ‘라이터’로 달궈진 가슴을 안고, 출구를 나오는 즉시 매표소로 돌아가서 <도쿄!>행 티켓을 끊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도쿄가 배경인 이 옴니버스 3부작은 무척 좋았다. 상영 중엔 몰입해서 몰랐는데, 나갈 때 보니 관객이 나 포함 세 명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금요일 밤인데! 난 정말 좋았는데, 텅 빈 객석이 안타까웠다. 크게 흥행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냥 묻히기에도 아까운 영화다. 분명 좋아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동네방네 알리고 싶어졌다. 이 감상평을 읽고 단 한 분이라도 재미있게 보신다면 나름 보람이 있겠다.

* 스포일러는 (거의) 없음!

인테리어 디자인 - 아키라와 히로코

기교를 부리지 않는 미셸 공드리는 최고다. 도입부는 새벽녘 케이블에서 줄창 틀어대는 일본 에로물인가 하는 의심을 들었다. 일본 여배우 특유의 귀여운 말투도 귀에 거슬리고. 그런데 점점 좋아지더니, 결말은 '심장이 덜컹!'하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가 좋다 싶었던 건, 집을 구하는 두 사람이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아주 긴 테이크부터다. 딱히 이유를 대기는 힘든데, 확 끌렸다. 정서적으로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나 보다. 그 장면 이후로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진행은 다소 투박하다. 한때 천재 소리 듣던 중견 감독의 작품치고는 세련되지 못하다. 근데 그 점이 또 좋다. 매끄럽지 못한 이음새는 몰입을 방해하기는커녕 독특한 리듬감을 만든다. 의도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정말 좋다.

주인공의 변신은, 누구는 이게 뻔한 설정이라고 혹평했지만, 변신 과정의 시각적 충격은 상당하다. 이런 경우, 영화가 소설보다 우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고 내가 떠올렸을 법한 그림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원작은 공드리 감독 여자친구의 만화라고 한다.)

갈등을 해소하지 않고 그냥 끝내버리는 무책임함도 마음에 든다. 다만 다음 편이 곧바로 시작하는 통에 여운을 음미할 만한 시간이 부족했던 점이 아쉽다. 어쩌면 이 단편은 나만의 보물인지도 모른다. 내가 느낀 매력을 다른 분들과 공유할 수 있을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정말, 정말 좋다. (참고로 시네21의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에 별 하나를 주셨고, 어떤 분은 시시하다고, 다른 분은 산만하다고 평하셨다. 쳇!)

그리고 내가 발견한 굉장한 비밀. 히로코 역을 열연한 후지타니 아야코 양이 글쎄, 스티븐 시걸 형님의 딸이라네! 데이트 신청은 목숨 걸고. ^^

후지타니 아야코 양

이 아이가

스티븐 시걸 형님

내 딸이다!

<도쿄!>에 대한 여러분의 평을 찾아보니, 열에 아홉은 <똥>을 최고로 뽑았더라. 확실히 다른 두 편을 압도하는 완성도와 도발적인 상징 구조를 지녔고, 영상미 또한 탁월하다. 드니 라방의 연기, 기가 막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등으로 뽑았다.

순전히 취향의 문제지만, 난 상징이 중심을 차지하는 작품은 별로다. 영화를 보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고, 영화를 보고 나서 되새기는 즐거움이 있는데, 상징이 너무 크게 나서면 첫 번째 즐거움이 방해를 받는다. 나처럼 멀티태스킹이 어려운 사람에겐 버겁다. 나는 객석에 앉은 동안의 정서적 교감을 가장 중시하는 타입의 관객인가 보다.

완성도가 아주 높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보는 중간에 작품의 완성도를 의식하게 되면, 퍼펙트게임을 의식하는 투수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린다. <똥>이 레오 까락스 감독에 대한 기대를 확실하게 채워준 ‘멋진 복귀작’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본 것도 사실이다. 물론 깜찍한(!) 마무리 덕분에 뒷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리고 한 말씀. 드니 라방은 상상 초월이다! 설명하려고 노력할수록 비참한 기분이 드는 명연.

흔들리는 도쿄

난 봉 감독의 팬이 분명하지만, 이 작품은 실망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듯 보인다. 미셸 공드리는 우습게 보시고 까락스는 현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방심하신 걸까. 다른 두 편과 나란히 비교하면 정말 아쉽다.

확실히 초반의 그 아름다운 빛깔은 황홀하다. 남자가 똥 누는 모습까지도 아름다울 만큼. 손끝으로 외로움을 더듬는 듯한 화면은 이와이 슌지보다 달콤하다.

아오이 유우

피자와 카터벨트, 그 감독의 취향.

그런데! 아오이 유우가 등장하면서부터 왜 감독님마저 흔들리시나요! 카터벨트도 낯 간지러운데, 허벅지의 버튼이라뇨! 그냥 아오이 양에게 빨간 옷과 카터벨트를 입히고, 기절시키고, 매끄러운 피부에 그림을 그려 넣고, 한번 눌러보고 싶으셨을 뿐인 거죠?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게다가 그 피자배달 로봇은 너무 창피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 가지 위안은 다케나카 나오토 아저씨의 뜻밖의 출연. 과연 굉장한 존재감이다.

나중에 봉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어 봤는데, 히키코모리에 관한 처음 아이디어는 아주 그럴 듯했다. 그런데 결과는 버튼과 로봇과 마무리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다. 누구가의 말씀처럼 봉테일에게 30분은 너무 짧은 걸까?

추천의 변

영화평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글이지만, 이 글로 단 한 분이라도 흥미를 느껴서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다. 적어도 모두 좋아하는 <똥>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하다. 그리고 혹평 때문에 평소 좋아하던 봉 감독님한테 살짝 미안하지만, 그냥 관객 한 명의 솔직한 감상일 뿐이니, 부디 너그러이. 다음 작품 <마더>, 엄청 기대하고 있다.

공드리, 까락스, 봉

(머리 크기로) 두 거장을 압도하신 봉 감독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