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장정일의 공부 - 인문학 초심자를 위한 맛있는 이유식

소설과 비소설을 통틀어 올해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2008년이 두 달 넘게 남았고, 책장에는 아껴둔 기대작이 두어 권 남아있지만, <장정일의 공부>는 ‘키노 선정 올해의 책 2008′의 가장 유력한 후보다.

흥미는 있지만 읽을 마음먹기가 힘들었던 분야의 책들을 요약, 비교, 해설, 비평한 이 친절한 ‘고농축 지식 보충제’는 재미의 질과 양 모두 마음에 쏙 든다.

공부?

예쁜 선홍색 표지가 눈길을 잡아끌었고, 제목을 보자마자 ‘공부? 무슨 공부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우선 그 대답부터 하자면, 이 책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정일 씨가 ‘넓은 의미의 현대사’를 공부하고 정리한 교양인문서다. 재미없을 것 같은 설명이지만, 무척 재미있다. 다른 인문서와 다른 부분은, 우선 서평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의 현실 사회와 밀접한 내용이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과 연관한 주제의 책들을 요약하고 비평하는 메타북. 또 다른 말로 하면, 주제별로 정리한 <장정일의 독서 일기> 특별판.

인문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어본 분이라면, 저자가 무시무시한 독서광이며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머릿말에서 자신은 “무식하고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곧 “무지의 중용”으로 이어졌다며, 무책임함을 벗고 확실한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한국 사회가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이며,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서야할 위치를 찾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무지의 중용”이라도 취하면 다행이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정치적 주장 가운데 뒷받침할 만한 이론적 토대나 객관적인 사실 정보를 갖춘 것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어느 당파가 좋은 정치를 펼칠 거라고 판단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걸까?

다들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려하지만, 심지어 이 책의 저자도 차마 입에 담지 않지만, 사실 우리 정치의 후진성은 우리의 무지와 무식에 기인한다. 주권자로서 우리의 모자람은 공부를 게을리 한 우리 자신의 책임인 동시에, “대중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정치권력의 흉계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답은 공부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최소한의 (정치적) 판단력을 갖춘 건강한 사회 구성원 양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니까, 당연한 말씀.

우리는 근대성의 포로

책 읽는 재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책의 내용을 간단히, 아주 간단히 소개하자면.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주제는 ‘탈근대’다. 식민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서양 중심의 세계관, 근대화론, 신자유주의 등 만만치 않은 주제의 책들을 너무나 가볍게 잘도 읽어대면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실체에 대한 학문적 해부를 시도한다. 읽다보면, ‘대한민국’이 근대성의 폐단을 골고루 갖춘 표본 같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탈근대를 다루되 이론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런 게 많았다면 아마 난 읽다 말았을지 모른다.) 주로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과 보편적 가치에 기대어 인문학 초심자인 독자의 이해와 흥미를 솜씨 좋게 보살핀다. 이 독후감에 ‘인문학 초심자를 위한 이유식’이라는 부제를 붙인 건 결코 비하가 아니며, 오히려 나 나름의 찬사다. 아는 만큼 재미있는 것이 공부이니, 저자의 세심한 노력은 분명 바라던 대로의 반향을 얻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치즘, 극단에 선 근대성

저자는 나치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나치즘이 주제이거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부서진 손잡이를 움켜쥐고’를 비롯해 전체 23개 장 가운데 6개에 이른다. 지면의 4분의 1을 들인 나치즘 탐구는, 우리의 집단주의적 성향을 감안하면 저자의 우려가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히틀러는 줄곧 박정희에 오버랩된다. 이게 무척 재미있다. 저자는 박정희에 대한 ‘집착’을 숨기지 않으며, 우리의 히틀러가 완전히 무장 해제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기세다. (장정일 씨의 다음 저작이 박정희 분석이라 해도 난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거다.) 진보 진영에서 박정희가 절대악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저자의 이런 태도에는 어떤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을 법한 냄새가 풍긴다.

그 밖의 내용과 나의 관심사

그 밖에 민족주의의 폐해, 잘못 낀 첫 단추 이승만, 또 하나의 제국주의 시오니즘, 조선인 전범, 진보정치의 좌절, 군사문화, 반공주의의 기원, 대중독재 등등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내용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창세기, 시오니즘의 생성-발달 과정, 미 제국의 몰락 등이 아주 흥미진진했으며, 전체주의와 근대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한 사실을 새로 배웠다. 친일에 가려진 조선인 전범과 조선 인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사회의 주류, 국가에 의한 기억 날조 등도 신선한 생각거리를 많이 얻었다.

공부는 독자의 몫

저자의 주장은 선명하지만, 모든 책읽기가 그렇듯 수용할지 말지는 독자 몫이다. 이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나만해도 저자와 다른 생각이 몇 가지 있는데, 나보다 보수적인 독자라면 반감을 품을 만도 하다. 다만 나와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고급 지식이 압축된 좋은 교양서는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며, 나와 다른 주장일수록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또 저자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님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어쩌면 전공자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비판거리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목이 말하듯 저자도 같이 공부하는 입장이다. 이 책은 공부 열심히 하는 옆집 아저씨의 노트라고 보면 좋겠다. 설사 틀린 내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남의 노트는 참고만 할 뿐,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 추측하자면, 저자도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단 좋은 자극을 주고 공부를 권유하는데 더 의미를 두었을 듯싶다.

마지막으로 ‘과두정이 온다’ 장에서 인용한 한 구절을 재인용해본다.

민주주의란 더도 덜도 아닌, 책을 읽는 능력이다.

옥의 티

놀랍게도 비문을 몇 개 발견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종종 눈에 뜨여서, 처음엔 내 무식을 탓했는데, 꼼꼼이 뜯어봤더니, 비문이었다. 주어-술어 관계가 묘한 문장을 두어 개를 찾았고, 따옴표 위치가 애매해서 문장 전체의 의미를 뒤집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저자의 책임이라기 보단 랜덤하우스 편집부의 책임이 크다. 그야말로 옥의 티다.

관련 링크 – 인터뷰 “장정일 – 나는 독서광이 아니다” (북데일리)

장정일의 공부 - 8점
장정일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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