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일요일

캐비닛 - 굉장히 재미있고 슬프고 무서운 농담

그야말로 우연히 읽은 소설. 김연수 씨의 작품을 훑던 중 실수로 뽑아든 책이다. “어, 김언-수네!”하고 도로 서가에 넣으려다가, 특이한 표지에 끌려 슬-쩍 들춰봤는데, 첫 문단부터 너무 재밌어서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공모전 대상작에, 꽤나 인기 있는 작품이다. 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 세상엔 재밌는 소설과 재능있는 작가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황당하고 근사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공기업 산하 연구소에 근무하는 공 대리(30, 총각)가 관리하는 '13호 캐비닛' 안에는 '권 박사' 영감이 40년 동안 모은, '심토머'에 대한 파일이 가득하다. 심토머는 도시 속에서 발현한 돌연변이, 또는 신인류. 공 대리의 하루 일과라면 심토머들과의 전화 상담 및 파일 관리다. 평범하진 않지만 나름 평온한 일상을 사는 공 대리. 그의 앞에 13호 캐비닛을 노리는 악당이 등장한다.

언뜻 유치뽕짝한 장르물 같은 줄거리지만, 이래봬도 '문학동네 소설상' 12회 수상작이다. 문학동네 책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에도 만족스럽다. 공모전 수상작답게 균형 잡힌 좋은 작품이고, 특히 읽는 재미가 굉장히 좋다. 문장 읽는 맛이 새콤달콤 최고다!

구라의 융단폭격

깔끔명료한 문체가 페이지 도둑이다. 군더더기 없고 리듬감 좋은 문장을 읽는 기분이 상쾌하다. 무심결에 한두 쪽을 읽고 나니, 활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런 짜릿한 경험, 꽤 오랜만이다. 흡입력 있는 문장이라 하면 바로 이런 문장이다.

작가는 정말 이야기꾼이다. 첫 장부터 탐색전도 없이 황홀한 구라의 융단 폭격을 퍼부어대는데, 몰입감이 굉장하다. 만약 이런 작품이 재미없다면 그대는 본래 남의 농담에 잘 웃지 않는 사람일 거다. 흥!

당대 어느 ‘구라 계열’ 작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한 말장난 솜씨를 뽑낸다. 농담의 속사포라 할 만한데, 이 정도의 개그 난사를 퍼부을 수 있는 자는 둘 중 하나다. 바보 아니면 자신감 넘치는 베테랑 구라쟁이. 물론 김언수 씨는 후자다.이 작품이 장편 데뷔작이라는데, 신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자신감이 놀랍고 매력적이다.

뜻밖의 클라이맥스

2부까지는 흥겨울 뿐인데, 3부 '부비트랩'에선 분위기가 일변한다. 새벽녘에 혼자 읽다가 그 섬뜩함에 깜짝 놀랐다.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태연하게 앉아있기 어려울 만큼 강렬하고 흉폭하다. 이건 뭐, 굉장히 내 취향이다. 으음, 정말 매력적인 소설이다. ^^

정말 끔찍한 괴물

심토머는 돌연변이지만, 정말 끔찍한 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드는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괴물 아닌가.

작가는 때론 은근히, 때론 노골적으로 거대 도시와 자본주의의 무자비함을 이야기한다. 주제를 전달하는 방법이 약간 투박한 듯도 싶지만, 이만하면 자기가 심토머인지도 모르는 독자에게는 꽤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은 확실히 농담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한참 깔깔거리다가 돌아서면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다. 작가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체제가 사실 우리를 돌연변이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진부한 얘기지만, 문학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볼 기회를 만든다. 이 작품을 읽은 누군가가, “그래,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분석하고 더 나은 세계를 꿈꿔야만, 우리를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 속 톱니바퀴로 만들려는 놈들로부터 (정신만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면, 그 어느 누가 문학의 가치를 폄하할 수 있을까.

<캐비닛>은 우습고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슬프다. 누구는 결말이 싱겁다고 하지만,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설득력 있는 결말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아주 조금 아쉬운 밀도

아쉬운 점도 있다. 괜한 트집인지 모르지만, 분량이 약간 많은 느낌이다. 350쪽이 넘는 분량인데, 250쪽 정도 압축했으면 더 좋았을 지 모르겠다. 1부와 2부의 일부가 좀 처지는 느낌. 여러 심토머를 쭉 나열하는 구성인데,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니 살짝 지루한 감이 있다. 조금만 더 속도를 냈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뭐, 이대로도 좋다. TV 시리즈물 같기도 하고.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꼽으라면,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인 더 풀> 정도. 두 작품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이라면 이 작품도 좋아하실 듯. 물론 난 이 작품이 더 좋지만. 아아,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캐비닛 - 8점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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