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3일 금요일

연극 '오이디푸스 왕' - 비극의 시작과 끝

극단 골목길의 <오이디푸스 왕>를 보고 왔다. 기대보다도 더 좋았고,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활자로 읽었을 때보다 더 크고 생생한 감동을 받았다. 오랜만에 연극을 보기도 했지만, 워낙 훌륭한 작품을 뛰어난 연출과 연기로 즐기고 나니, 설렌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4월 16일부터 25일까지 딱 열흘 동안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다. 이번 주 일요일이 마지막 공연인데, 되도록 많은 분이 보시고 오늘 내가 느낀 희열을 맛보셨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다.

*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을 이미 안다면, 스포일러는 (거의) 없음!

오이디푸스

원작에 충실한 작품

애초에 이 작품을 보겠다고 각오 - 파주에서 혜화동은 각오가 필요한 거리다 - 를 한 건,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라는 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등 누구나 다 아는 고전 희곡은 오히려 원작 그대로 연출한 작품을 찾기 쉽지 않다. (연출가나 배우들에게는 고전이 지겹기도 할 테니, 이해도 가지만.)

이 작품은, 내 예상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상당히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다. 축약한 부분도 많긴 하지만, 전체 이야기 구성과 중요한 대사들은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오이디푸스 왕>의 실연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이 작품을 만난 건 행운이다. 책으로 읽으며 전율했던 대사들이 배우들의 입과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순간의 신비는 정말 대단하다.

압도하는 오이디푸스와 탄탄한 조연들

특히 오이디푸스 역을 맡은 김주헌 씨의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다. 좌중을 완벽하게 압도하는 오이디푸스. 일인극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렬한 오이디푸스.

배우들의 연기는 전체적으로 다 좋다. 광기의 오이디푸스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이재수 씨가 연기한, 약간 심심한 듯 차분한 크레온도 좋고, 다른 조연들도 몰입에 방해되는 요소 없이 모두 안정적이다.

이오카스테도 무척 매력적인데, 사실 난 이오카스테의 모습을 많이 놓쳤다. 내 자리가 워낙 구석이긴 해도 관람에는 거의 지장이 없었는데, 유독 이오카스테의 모습만 다른 배우들에게 많이 가렸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입맞춤하는 장면도 못 보고 말았으니. (이런)

그렇지만 초조한 오이디푸스를 달래는 이오카스테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사랑스러운 어머니이자 아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겉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했다. (배역 때문이겠지만, 배우 이성자 씨에 대해서도 무척 호감이 간다. 또 보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파멸을 예감한 이오카스테가 진실의 끝을 보려는 오이디푸스를 말리는 장면. 배우의 몸짓으로 직접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양치기 역을 맡은 김도균 씨도 대단했다. 클라이맥스 즈음에 등장해서 짧지만 놀라운 연기를 펼친다. 그야말로 히든카드.

클라이맥스, 클라이맥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정말, 정말, 정말 최고다.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의 긴장감과 최고조에 이른 순간의 그 무시무시한 폭발력.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데, 손 안에 땀이 흥건하다 못해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내가 본 연극 가운데 단연 최고의 클라이맥스다.

이 멋진 클라이맥스는, 오이디푸스도 물론 훌륭하지만, 상대역인 양치기의 공이 절반이다. 두 사람이 쌓아올리는 위태로운 에너지 때문에 무대는 폭발 직전의 폭탄을 심어놓은 듯하다

클라이맥스 이후,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밧줄' 장면은 나는 전혀 상상도 못한 광경이다. 그 비장감 역시 원작 이상이다. 배우들도 대단하고, 연출가 분도 참 대단하다고 밖에.

현대적 코러스의 극적 효과

코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원작의 코러스는 사실 살짝 지루하기도 한데, 이 작품의 코러스는 담백하면서도 굉장한 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구성은 단 4명뿐이지만, 무대 효과 덕분에 일당백이다. 특히 오이디푸스와 코러스 4명이 맞상대하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박진감이 대단하다. 연출, 그리고 배우들 간의 호흡의 승리.

그런데

아쉬운 점이라기보다는 연출가 님한테 여쭙고 싶은 게 몇가지 있는데..

우선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성격이 내가 이해한 것과 많이 달라서 낯설다. 원작 속 예언자보다 훨씬 도발적이다. 현인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다. 원작에선 오이디푸스와 예언자의 설전도 클라이맥스에 버금가는 긴장이 흐르는데, 이 작품에선 약올리기 정도로 축소됐다. 또, 예언자의 운명도 좀 다른데, 음, 이 작품에서는 오이디푸스를 완전히 나쁜 놈으로 만든 셈이다. 대단히 극적이기는 한데, 그 의미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거 같다.

또, 결말부에서 오이디푸스와 크레온이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오이디푸스가 딸들(이자 여동생들)을 걱정하는 부분을 뺀 것도 아쉽다. 원작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아버지인 채로 끝난다는 느낌이었느데, 연극에서는 아들로서 끝이 났다는 인상이다. 뭐, 그것도 좋긴 하지만.

...

내 감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전율"이다. 이 작품을 못 봤다면, 내 인생은 지금보다 조금 더 재미없었을 거다. 아직도 설렘이 가라앉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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