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1일 목요일

남한산성 - 고통과 치욕 속에서 찾는 삶의 무게

공들인 문장을 읽는 즐거움

작가 김훈의 문장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호흡이 긴 문장이 많고, 요즘엔 낯선 옛 낱말들도 많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지 않으면 읽고도 뜻을 알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이야기와 상관없이 무심하게 펼쳐지는 풍경 묘사는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을수록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깨닫게 한다. 김훈 소설의 큰 매력이다.

아주 간결한 문체 또한 작가의 장기다. 힘이 넘치고 묵직한 단문은 헤밍웨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단문이 언어적 ‘아름다움’을 돋보인다면, 김훈의 단문은 극적인 장치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듯싶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고독과 비장감은 무심하고 묵직한 단문들로 더욱 돋보인다. 유독 남성 독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성적인 단문일 게다.

날 것과 남성다움의 미학

내용은 알려진 대로 병자호란 동안 인조 임금이 파천한 남한산성 안의 이야기다. 역사소설은 흔히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쪽으로 빠지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와는 거리를 둔다. 오히려 우리 역사의 수치스러운 한 시기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극한의 고통과 치욕을 감내하고 살아남는 과정이 이 소설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읽을 만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작품이다. 물론 내 취향과 잘 맞기 때문인데, 자학적인 남성다움의 미학이라든가, 문제적 인물들에 대한 옹호, ‘날 것’ 냄새가 진동하는 묘사 들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싫을 수도 있겠다. 작가의 팬으로서 이에 대한 변명을 조금 해볼까 한다. ‘남성다움의 미학’은 요즘에는 후진 것인지도 모른다. 메트로 섹슈얼이 득세한 세상에 ‘남성다움’이라니. 하지만 나를 비롯한 어떤 부류의 남자들은 분명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이 감추고 살아간다. 여성차별이나 마초, 폭력과는 다르다. 그냥 고도산업사회에 길들여진 순한 남자들의 깊은 곳에 감춰진 비밀스런 환상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모욕으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내게 김훈 소설은 고급스러운 홍콩 느와르와 같은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하드보일드한 인물들은 저마다 주어진 일을 수행할 뿐이다. 해야 하니까 할 뿐. 적이나 약자에 대한 연민에 괴로워하지만, 소임을 맡은 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로 잡아먹을 듯 논쟁하는 척화파의 김상헌과 화친파의 최명길 또한 어전에서 물러나면 서로를 존중하며 연민의 정마저 보인다. ‘너의 가련함은 알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구나.’라는 독백이 장면마다 들리는 듯하다. 이런 설정은 고통을 초래한 지배층을 위한 변명으로 읽을 수도 있고, 운명을 감내하는 조용한 영웅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역사보다는 사람

작가는 의도적으로 병자호란에 이르는 과정을 생략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자체에 집중한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지배층의 무능과 아집을 운운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미 다른 작품들이 실컷 욕해줬기도 하고.) 그저 고통과 치욕을 관통하는 모습을 별다른 설명없이 ‘보여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부각되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아니, 의지도 아닌 본능이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지만, 역사는 그야말로 배경일 뿐이다. 진짜 주인공은 ‘고난 속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삶’이다. 왕도, 신하도, 백성들도, 조선이라는 나라도, 극한의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풍파에 산화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 결과, 우리가 이 땅에서 그들을 우리의 조상이라 여기고 살고 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삶은 고통스럽고 때론 추하지만, 살아있는 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삶은 결과론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쪽이 진짜 승리자다.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게 작가의 이런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약간 진부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분 좋은 끝맺음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다른 분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했다. 우리 사회는 분명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동시에, 약소국이었던 과거에 대한 자조(自嘲)적인 말들도 많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척화론과 주화론 사이에서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는 작가에 대해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명분과 이득도 열심히 살아남은 사람 앞에서는 초라하게 보일 뿐이지 않은가.

남한산성 - 8점
김훈 지음/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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