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슬픈 피자가게

우리 식구들 가장 즐겨 먹는 패스트푸드라면 단연 6,900원짜리 고구마 피자다. 값싸고, 빨리 나오고, 꽤 먹을 만할뿐더러, 우리 집 입 수에 딱 맞는 2.5인분이어서 참 좋다. 이곳에 이사 오고부터 한 달에 두세 판씩은 꼬박꼬박 먹은 듯싶다. 마침 피자집이 매일 지나는 길목에 있다 보니, 집에 들어오는 길에 아내의 긴급 지령이 떨어져도 문제없다. 유일한 불만이라면, 점심때나 주말에는 워낙 바빠서 3,4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피자집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저녁 7시 즈음 가게 앞을 지나치다가 슬쩍 들여다보면, 아저씨가 넋을 놓고 TV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즈음이면 늘 오븐 앞에서 땀 흘리는 모습만 보다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TV 화면을 응시하는 얼굴을 보니 낯설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피자를 주문할 때, – 보통 전화로 미리 주문해놓고 얼마 뒤 직접 찾으러 간다 – 10분 뒤 찾으러 오라는 대답도 심상치 않았다. 피자를 굽는 시간이 20분 이하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피자를 찾으러 가보니, 과연 우리 피자를 끝으로 오븐은 비어 있었다.

대박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장사가 잘되던 집이 불과 십수 일 만에 파리가 날리게 된 건, 30미터 앞에 새로 생긴 5,900원짜리 피자집 때문이었다. 오늘 그 새로운 피자가게 앞으로 지나며 보니, 과연 손님이 제법 많았다. 딱 얼마 전 6,900원 피자집의 모습이었다.

내가 남의 처지를 걱정할 만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자연스레 6,900원 피자집의 앞날이 걱정스러워졌다. 주인아저씨는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처음 장사를 시작한 사람으로 보인다. (쭈뼛거리는 손님 접대 태도를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꽤 목이 좋은 지금의 위치에 피자 체인점을 차리는 데는 아마도 아저씨의 퇴직금 전부와 얼마의 빚이 들었겠지. 지금까지의 호시절 동안 투자금을 얼마나 회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오래된 가게가 아니니까 잘해야 체인 본사에 상납한 돈 정도 뽑았을 듯싶다. 모르긴 몰라도, 권리금을 다 받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에, 6,900원 피자집은 절대로 망해선 안된다.

값싼 별미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은 오늘 또 6,900원짜리 고구마 피자를 사 먹었다. 피자 토핑이 전보다 살짝 풍성해진 사실을 아내가 용케 알아차렸다. 주인아저씨도 멍청히 당하기만 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아들은 겨우 한 조각을 먹고는 배부르다며 방으로 내뺐다. 내 입에도 어딘가 전보다 못한 듯싶었다. 아저씨의 대응책은 일단 우리 집에선 실패다.

이제 6,900원 피자집 주인아저씨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몇 달 버티지 못한다.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딱 하나, 이쪽도 5,900원 짜리 피자를 만드는 방법뿐이다. 수입은 대폭 감소하겠지만 당장 망하는 사태는 모면할 수 있겠지. 그러나 둘 중 하나가 망해 없어질 때까지 삶의 질의 하락은 불가피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사 경험이 거의 없는 아저씨는 다른 수를 떠올리지 못할 공산이 크다. 불행히도 내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아저씨의 가족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그게 한국이라는 게임판의 규칙이다. 피자에 대한 수요는 변함없고, 공급만 늘었으니, 가격이 내려가는 게 시장의 원리. 덕분에 우리 동네 사람들은 천 원 더 싼 피자를 먹을 수 있게 됐고, 한 가정은, 혹은 두 가정은 붕괴의 위기에 처했다.

딱히 시장의 원리를 탓하는 건 아니다. 그도 이로운 면이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냉정한 손이 벼랑 끝에 선 선량한 사람들의 등을 툭툭 밀어대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 거참 말은 좋다. 근데 왜 그 효율의 칼날에 베이는 건 늘 우리여야만 하는데? 진짜 자본가들, 재벌의 시장은 죄다 독과점 상태여서 초과이윤을 잘도 쪽쪽 뽑아먹는데, 노동자와 소자본가들은 살벌한 완전경쟁 시장에서 제 살 깍아먹기를 계속해야만 한다. 정말 엄청나게 가진 자들에겐 시장의 원리는커녕 법의 손길조차 무력하다. 우리가 한 번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지만, 정말 힘센 자들은 얼마든지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도, 정부가 나서서 쉬쉬하며 도와준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말이다.

왜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우리는 많고 저들은 적을뿐더러, 우리에겐 투표권이라는 썩 괜찮은 무기가 있는데도, 왜 우리는 이런 손해만 보는 게임을 계속하는 걸까. 소수가 (대개 시장 외 수단으로) 자원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남은 부스러기를 놓고 힘없는 다수가 살아보겠다고 피 튀기게 상쟁하는 이 비극적 상황은 언제쯤 끝이 날까. 솔직히 방법은 다들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유령은 왜 늘 떠돌기만 할까.

6,900원 피자집 주인아저씨는 그의 진짜 적이 5,900원 피자집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실까. 아마 모를 거다. 애독하시는 조선일보는 그런 건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을 테니까.

댓글 4개:

  1. 이번에 읽은 책이랑 뭔가 통하는 글인거 같아서 트랙백 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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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rackback from: 가난뱅이의 역습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직접 해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했던 작전들을 소개해준다. 책에 나와있는 오프라인 작전들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 작전들은 평화적이면서 재미도 있어보이고 사람들 사이의 정도 느껴지는 것 같아서 따라해보고 싶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p.20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만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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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onpen - 2009/09/13 23:35
    재밌을 것 같은 책이네요. ^^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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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rackback from: 비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한 합리적인 시장
    회사와 공공기관은 멍청한 시스템 때문에 엄청난 인건비를 낭비한다. 이런 비용은 알게 모르게 소비자 가격에 고스란히 얹어진다. 부동산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사람들은 바보같은 대학을 졸업하려고 어마어마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한다. 스타벅스 커피는 설렁탕이나 백반보다 비싸다. 쓸모없는 직원들의 인건비, 아파트값, 사교육비, 대학등록금, 커피값 머 기타등등. 우리는 말도 안되는 비용들을 지불하느라 스스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노예가 되어간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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