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9일 금요일

여행할 권리 - 너와 내가 만나는 곳에서

기행문을 좋아하는데, 많이 읽진 않는다. 좋은 기행문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이 적다기 보단, 이런저런 외국 탐방기가 워낙 많은 탓이다. 그만큼 수요가 있으니 꾸준히 나오겠지만, 아무튼 다들 기행문을 쉽게 도전할 만한 장르라고 여기나 보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기행문도 수필의 한 갈래이니, 가다듬은 생각을 낯선 장소라는 소재와 버무려 글로 빗어내는 솜씨가 관건이겠다. 이국 풍물 소개가 아무리 재미난 글이라도, 생각과 솜씨가 변변치 않은 글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다시 말해, 여행자의 진지한 탐구의식과 문학성이 결여된 기행문은 미지근하고 퉁퉁 불은 콩국수와 다름 없다는 거다. (왜 하필 콩국수냐고는 묻지 마시라. 어제 점심에 겪은 재앙을 다시 떠올리고 싶진 않으니.)

운 좋게도 좋은 기행문이랄 만한 책을 몇 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가운데 존 스타인벡 옹의 <Travels with Charley>와 하루키 형님의 <슬픈 외국어>는 지금도 가까이 두고 종종 꺼내본다. (전자는 <찰리와 함께 한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꽤 좋은 번역본이 나와있다. 그리고 <슬픈 외국어>는 기행문이 아닐지도…) 좋아하는 두 작가의 목소리로 듣는 이방인 특유의 시야와 정서는 곱씹을수록 쫄깃하다.

이 두 권의 책 옆에 김연수 작가의 <여행할 권리>를 꽂아두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결국 사고 만 책이다. 통념과 달리, 도서관은 책 구입비 절감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꽤 좋은 도서관이 있는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오히려 책을 더 사고 있다.) 두고두고 읽을 만한 김연수 표 문장뿐만 아니라, 내 관심의 사각지대를 향하는 작가의 시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지 않을 도리가 있나. 고백하자면, 아내 몰래 김연수 씨 책을 한 권 한 권 사 모으고 있다. 마님은 빌려 읽은 책을 다시 사 보는 걸 이해하지 못하신다. 본래 타인의 취미라는 게 다 그렇지만.

국경 없는 나라

처음부터 흥미를 잡아끄는 건 ‘국경 없는 나라’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 반도의 남쪽 절반은 실은 ‘섬’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린 한 번이라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고민해보긴 한 걸까. 작가의 여행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작가가 말하는 ‘국경’은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넘을 수 있는 선. 둘 이상의 집단을 따로 나누되, 나뉜 것들이 필연적으로 뒤섞이는 곳. 이곳과 저곳을 분명히 가르되, 그 차이가 큰 의미가 없는 곳이다. 우리에게 그런 곳이 있던가. 우리는 사실 우리-남을 가르는 데 천재적인 족속이긴 하지. 작가는 그런 우리를 슬픈 눈으로 되돌아본다. 우리와 남이 만나는 곳, 작가가 고집스레 그런 곳을 찾아가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공교롭게도 난 우리를 둘러싼 (작가에 따르자면) 유사-국경에 대해 조금은 아는 편이다. 작년인 2008년 9월까지 남쪽 끝인 서귀포에 살다가, 이젠 북쪽 끝인 휴전선 바로 아래 살고 있으니까. 차로 5분만 나가면 북녘 땅이 훤히, 말 그대로 훤히 보인다.

작가는 휴전선 이북을 바다와 같다고 말했지만, 내겐 신기루인 것만 같다. 매일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볼 땐 – 그렇다. 난 창문에서 바다가 바로 내다보이는 집에 살았던 것이다! –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 미지의 무언가가 떠올렸다. 그렇지만, 휴전선 너머로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다. 잿빛 벽에 그린 그럴듯한 벽화 같기도 하다. 무언가 상상해보려 해도 저놈의 철조망만 보면 죄다 사라지고 만다. 갈 수 없는 곳이란 그런 것이다.

작가가 찾는 국경은 응당 ‘사람이 지나는 곳’이지만, 우리에게 국경은 ‘단절’을 뜻한다. 그 중간에 걸치는 건 모두 배신, 배반일 뿐이다. 단적인 예는 재일-재중교포를 대하는 남한인들의 태도다. “너 뭐냐, 한국 사람이냐, 쪽발이냐, 짱깨냐.” 정녕 그 세 가지 답안으로 그들의 정체성이 구분된다고 믿는 걸까?

여행할 권리란 뜻대로 국경을 넘을 권리,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때론 부담스러운 이름표를 잠시 떼어놓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뒷이야기

김연수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면, “도대체 이런 작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비슷한 경외감이 들긴 하지만, 김연수 작품의 경우, 특히 그 배경이 대단히 생생하기 때문에 더욱 호기심이 인다.

그 대답 일부가 들었기에 이 책은 더욱 값지다. 최근작 <밤은 노래한다>에 관한 내용이 많으니까, 둘이 세트라고 해도 좋겠다.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한참 뒤에 이 책을 읽었음에도, 작품에 대한 작가의 언급(설명?)이 무척 재미있다. <굳빠이 이상>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다른 작품 관련한 내용도 있는 듯한데 김연수 팬 필수 아이템이랄 만하다.

단, 작품에 앞서 이 책을 먼저 읽는 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이유인즉슨, <밤>의 경우, 작가 스스로 어느 인터뷰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라고 말해놓고는, 이 책에서 속마음을 슬쩍-홀딱 털어놓기 때문이다. 이건 감상에 방해될 법도 하다. 아무래도 실수하신 듯싶지만, 그래도 작품 뒷이야기는 즐겁다.

노란 동그라미

이 책엔 결정적인 단점 한 가지가 존재한다. 280쪽이 넘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매번 약 0.6초 동안 사팔뜨기가 되곤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양 책장 사이에 샛노란 동그라미를 그려 넣을 생각을 떠올린 이는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는 이 터무니없는 디자인을 승인한 편집자의 죄가 더 크다. 어느 날 창비 사옥 앞 – 우리집에서 차로 15분 거리다! –에서 한 손에 노란 페인트통, 한 손에 <여행할 권리>를 들고 서성이는 아저씨를 본다면 나라고 생각해도 좋다. 네놈들 미간에다 큼지막한 노란 원을 그려 넣고 말 테다!

덧말

이 책을 소개하려면 “재밌고 유익하고 강추다.”라고 한 문장만 써도 될 걸, 길게도 쓰고 말았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흥분해서 호들갑을 떤다는 거, 알만한 분은 아시겠지만.

그리고 김 작가님의 '배우 데뷔설'은 사실로 밝혀졌다. 극장행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 후후.

링크

여행할 권리 - 8점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잘도 못생긴 얼굴

어제, 하루종일 가슴이 먹먹하고 코끝이 시큰했다.
자려고 누웠더니, 그 못생긴 얼굴이 천장에 그려졌다.
추억하며 잠들었더니, 꿈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고 일어났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

2009년 2월 17일 화요일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 - 애정을 담아 작가 지망생에게

'작가 되기'에 관한 책은 은근히 많은데, 그 가운데 이 책은 단연 눈에 띈다. (판형부터 남다르다!) 작가가 되려는 스누피에게 '유명' 작가들이 조언을 하나씩 하는 구성인데, 꽤 재미있고 분량도 200쪽 남짓에 불과하고 만화가 절반 정도이기 떄문에 반나절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다.

예비 작가를 위한 흔하지만 따뜻한 조언

기성 작가들의 조언 한 편은 길어야 3쪽 정도인데, 큰 도움이 되는 가르침부터 영 뜬구름 잡는 소리까지 조언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글을, 특히 소설을 쓰고자 하는 독자라면 대체로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예비 작가를 자극하고 격려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작가 지망생이라면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는 데 꽤 도움이 될 듯.

하지만 책 속 조언들이 아주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소설가를 꿈꾸며 '작가되기' 책을 열심히 읽은 당신이라면,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말들이 많다. 그걸 한 문장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한 자라도 더 써라. 다 써봐야 거절 당하겠지만 좌절하는 순간 소설가의 꿈은 영영 안녕이다.

이에 관련해서, 얼마 전 돌아가신 존 업다이크 옹 – 고인에게 평화를! – 의 말씀을 참고할 만하다.

정말 대단한 방법을 알고 있다면, 나 혼자만 알고 있을 겁니다. 안 그러면 업계가 너무 복잡해지거든요.

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방법'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특히 소설가가 되고 싶은 청소년에게는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나도 어릴 적엔 – 누구나 한때 그러하듯 –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른바 '작가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의지박약'이라는 만성 질환 때문이었는데, 그때 만약 이런 조언들을 들었더라면, 적어도 노력은 더 해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책의 미덕 한 가지. 통독할 필요 없이 틈날 때마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 고로, 화장실 비치용으로 아주 좋다.

누구신지?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건, 조언을 주신 '유명' 작가님들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작가 지망생을 위해 친절한 조언을 베풀어 주신 건 정말 고맙지만, 도대체 누구신지 알 수 없으니, 미심쩍은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내가 읽어본 작가는 시드니 쉘던 뿐. (아직 살아계셨군요.)

나 같은 속물들은, 기왕 조언을 들을 거라면 '진짜' 유명인의 말씀을 선호한다. 폴 오스터나 조이스 캐롤 오츠 같은 분이 한 말씀 해주셨다면, “오오 역시!!” 했을 텐데. 이건 뭐, 누구신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난 이 책보단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가 더 유익한 듯싶다. 미국식 장르문학 쓰기를 배우려면, 스티븐 킹의 책이 훨씬 좋다. 첨삭 원고까지 공개한 킹 사마에 비하면, 이 책의 조언들은 아무래도 약하고, 너무 짧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책의 공동 편저자인 몬티 슐츠는 <피너츠>를 그린 만화가 故 찰스 M. 슐츠의 아들이다. 그 자신도 소설가지만, 아마 ‘아버지의 아들’로 훨씬 더 유명하겠지. 책 분량의 반을 차지하는 스누피를 보면서, "돌아가신 아빠를 잘도 우려먹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뭐, 그러면 또 어떤가? 어쨌든 자기 아빠고, 우려냄의 결과물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책을 읽기 쉽게 만든다는 건 나쁜 일은 아니니까. 또 스누피는 보고 또 봐도 귀여우니까.

다른 작가들의 창작법이 궁금하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을 번역한 소설가 김연수 님은 아마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작품을 쓰는지 무척 궁금하신가 보다.<청춘의 문장들>에서도 작가들의 집필 방법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데뷔한지 16년이나 된, 그리고 이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진짜 유명 작가인 그도 자기 창작법에 대한 불안이 있는 걸까? 아니면 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한 배려로 읽어야 할까?

머리말을 놓지지 마세요

아참, 이 책을 읽으실 분이라면 몬티 슐츠가 쓴 머리말을 꼭 읽으시길. 난 사실 이 책의 내용을 통틀어서 머리말이 가장 좋다. 아버지에 대한 회고담인데, 문학작품을 매개로 평생 아버지와 마음을 나누었던 저자의 추억이 부럽다. 무척.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 - 6점
몬티 슐츠.바나비 콘라드 지음, 김연수 옮김/한문화

2009년 2월 9일 월요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초보 마르크스주의자를 위한 지침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혁명을 믿지 않는다. 우리가 속한 사회-경제 체제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지는 아주 자-알 알지만, 마르크스가 약속한 “다음 세상”이 더 좋을 지는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세상을 알면 알수록, 좌파가 되지 않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현실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힘있는 소수가 힘없는 다수를 부당하게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 때, 마르크스의 근대 문명 비판은 좋은 길잡이가 된다. 우리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려면, 마르크스에서 묻는 게 가장 빠르다.

도대체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이 책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설명하고, 사회 이슈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을 정리한 내용이다. 일반 노동자 대상으로 쓴 책이기 때문에, 내용이 굉장히 쉽고 현실적이다. 다양한 사회주의 분파를 포괄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적 사회 인식을 이해하기에 좋은 교재다. 제목 그대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노동자가 되는데 필요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주장이 명료하고 예상되는 반론을 재반론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논쟁법을 배우는 데도 좋다. <자본론>의 요약이 아니라, 당장 벌어지는 일들의 원인과 대처법을 설명하기 때문에 재미있고 유익하다. 상당히 적은 분량이지만 한 쪽도 버릴 것 없이 알차다. 소련이 건재하던 1980년대에 쓴 글이 2009년에도 유효할지 의심스럽겠지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비판을 쓴 건 19세기 말이다. 5장 ‘사회주의자는 다음에 대해 무어라고 주장하는가?’를 읽다 보면, 역사가 거의 진보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원론적이고 강경하다는 점은 미리 각오해야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면 오직 혁명 뿐”이라는 입장이다. 꽤 세다. 좌파, 진보, 사회주의, 공산주의, 빨갱이 등의 용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은 분명 오해할 만하다. 아니, 이 정도면 단순한 오해가 아니다. ^^

늘 그렇듯 책은 읽는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기는 버겁지만, 지배계층이 억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분석은 대단히 날카롭고 믿을 만하다. 4장 ‘지배전략’과 5장을 읽다보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보수세력과 정당, 정부, 재벌, 보수언론 들이 굉장히 교과서적 수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본다.

지배계급…은 법과 질서를 열렬히 외쳐 댄다. … 법이 지키는 것은 … 주민 전체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경제는 반드시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를 낳게 마련이므로, 법도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게 돼 있다. … 지배계급은 고위 법조인들을 꽉 잡고 있다. 판검사들은 대부분 자본가들의 자녀거나 사위다. .. 그 자신이 상층과 중간 계급 소속(이다). … 법은…가난한 사람에 맞서, 부자를…착취하는 자들을…지금 힘깨나 쓰는 자들을 보호해 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야 전혀 새로울 게 없다.

국가가 탄압을 강화하는 데 범죄의 실제 증가나 “민생치안” … “법과 질서”라는 구호만한 것은 없다. 범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범죄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 108쪽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데, ‘법 질서 수호’는 즐겨 사용되는 수법이다.

(애국심은) 국가의 힘과 권위를 강화하는데, 이는 피착취자에 대한 착취자의 지배를 유지하는 주요한 동력이다. … ‘우리 산업을 구하자’, ‘우리 나라가 다시 나아가도록 만들자’라는 말로 가득 차 있지만, 그건 ‘우리’ 산업, ‘우리’ 나라가 아니다. 둘 다 모조리 지배계급의 것이다. – 116쪽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대기업 광고는 볼 때마다 섬뜩하다.

덧글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겁먹거나 흥분할 것 없이, ‘계급 없는 대안사회 건설’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건, ‘돈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 모순적인 계급 구분 없이 모든이가 소중한 존재로 존중받는 세상일 거다. 누군들 그런 세상을 바라지 않을까? 문제는 항상 방법이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8점
존 몰리뉴 지음, 최일붕 옮김/책갈피

2009년 2월 5일 목요일

알라딘의 선물, 밤은 노래한다

알라딘에서 선물을 보내왔다!

읽고 싶던 <밤은 노래한다>. 그것도 김연수 작가의 친필 서명이 담긴 ‘귀한’ 책이다.
작년 말 “2008 올해의 저자” 투표에 참여했는데, 운 좋게도 경품에 당첨된 거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다. 기쁜 마음에 받자마자 인증샷 찍고 자랑부터 해 본다.

밤은 노래한다 표지

밤은 노래한다. 유두가 흠좀...

밤은 노래한다

표지 디자인과 일러스트가 멋지다!

밤은 노래한다

뒤도 멋있지만, 카피가 좀.

밤은 노래한다 저자 서명

짜잔!

밤은 노래한다 저자

문장뿐 아니라, 손글씨도 참 예쁘다.

아아, 올해 들어 가장 황홀한 오후다.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 홍세화가 만난 열린 마음의 빠리

홍세화 씨의 신문 칼럼을 종종 읽는데,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긴 글을 읽고 싶은 마음에, 대표작 격인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자>을 '이제야' 읽었다. 베스트셀러라면 괜히 미워하는 내 별난 심보 덕분에 초판 발행 후 13년만이다.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아쉬운 점도 있지만, 생각거리가 많고 재미있는 책이다. 보통의 외국생활 회고담보단 영양가가 훨씬 높다. 피상적인 풍습의 비교에 머무르지 않고, 그 근원인 ‘생각의 틀’을 비교한다. 프랑스의 민주주의 정신과 똘레랑스를 읽다 보면, 우리에게 강요된 생각의 틀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돌아보게 되고,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로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외부 세계와 주고받음이 필수적이다. 해외여행이나 유학도 좋지만, 타인의 경험을 읽는 것도 아주 좋다. 특히 이 책은 ‘나가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의 모범 답안에 가깝다. 20년 이상 관찰한 결과물이므로 일시적인 호감-반감이 아닌, 프랑스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인다.

아쉬운 점은 산만한 구성이다. 아마 출판사 측에서 재미를 배가할 목적으로 내용 순서를 꼬아놓은 듯한데, 덕분에 가벼운 인상만 배가됐다. 시간순서에 따르면서 드문드문 뒤를 돌아보는 구성이었으면, 훨씬 더 감동적이었을 거다. 플래시백 남발은 독자의 집중을 방해할 뿐이다.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쓴 책이니만큼, <홍세화 칼럼>과 같은 밀도 높은 주장은 없지만,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을 엿볼 수 있어서 좋고,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도 많다. 아직까진 홍세화 씨의 존재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이 책이 많이 팔리고 읽혔다는 사실이 반갑다.

침묵하는 민주주의는 없다

읽다 보면 화두를 여럿 발견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
개정판의 136쪽을 보면, 저자가 프랑스인과 말다툼한 일화 한 토막이 실려 있다. 수수료 문제로 현지인 영업사원과 심한 논쟁을 벌인 저자는 “이제 저놈하고 말도 안 섞어!”하고 앙심을 품지만, 다음날 그 프랑스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저자는 그 모습에 당황하고 만다. 이 일화 뒤에 저자가 덧붙인 해설은, 그 프랑스인은 저자의 ‘주장을 반박’했을 뿐이지만, 천생 한국인인 저자는 ‘내 주장을 반박한 그 사람을 미워’했’다는 것이다.

평소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던 터라, 저자의 지적이 통쾌했다. 점점 나아지는 추세라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논쟁의 기술’이 부족하다. 논쟁은 드물고, 언쟁(말싸움)은 너무 흔하다. 논쟁은 논리의 싸움, 주장 vs 주장인 데 반해, 언쟁은 비생산적인 자존심 싸움이고 그 결과는 대개 미움이다. 의견이 다르다는 게 증오의 이유가 되는 사회가 과연 정상일까?

논쟁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넌센스다. 수없이 많은 주장으로 가득 찬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토론과 논쟁은 필수다. 다수결의 논리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다수결 ‘승부’가 민주주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싶다. 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노력 없이, 승자가 권력을 오로지하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 아닌가. 일단 승자가 되면 소수의 의견은 묵살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논쟁 자체를 거부하는데,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독재’일 뿐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우리 스스로 입과 귀를 열어야 한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개똥'이다. 원하는 바를 떳떳이,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자. 그리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더라도 미워하지 말자. 이해하고 설득하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링크 – 홍세화의 아름다운 나라, 홍세화 칼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6점
홍세화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009년 1월 4일 일요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수없이 많은 나를 찾아서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처음인데, 익숙하면서 새롭다. 언뜻 8,90년 대 한국소설의 느낌이 나지만, 실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소설이다. 옛 냄새가 살짝 감돌 뿐, 분명 21세기의 소설이다.

꼴랑 단편집과 수필집을 한 권씩 읽고 뭐라고 평하기 남세스럽지만, 이 단편집을 읽으며 "김연수는 진짜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틀림없이 좋은 작가다. 읽는 내내, '즐거움이 솟아나는 샘'을 발견한 흥분과 떨림을 만끽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라도 내가 몰랐다면 발견! ^^)

변신에 능한 초능력 소설가

훌륭한 소설가임은 분명한데, 내 취향인지 확실치 않다. 단편집 전체를 보면 아주 좋은데, 수록된 몇몇 작품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건 아주 좋고, 싫은 건 아주 싫다.

까닭인 즉슨, 작품마다 형식과 분위기와 문체가 굉장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비슷한 시기에 쓴 작품이 맞나 싶을 만큼, 작가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작품이 요구하는 대로 얼굴과 말투를 척척 바꾸는 문장의 달인. 김연수처럼 변신에 능한 작가는 처음이다. 이건 노력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처럼 느껴진다. 마치 초능력처럼.

최고급 단편, 아름다운 시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뿌넝숴(不能設)>, <거짓된 마음의 역사>, <남원고사>, <이렇게 한낮 속에 서있다> 들이다. 형식과 내용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단편이다. 아름다운 문장, 참신한 소재, 재미있는 서사, 실험적 형식 등 장점이 가득하다. 누가 한국 단편문학의 현주소를 묻는다면, 당당히 이 단편집을 내놓으리라. 난 영미권 단편을 굉장히 좋아하고, 우리 작가들의 단편은 살짝 시시하게 여겼는데, 위의 작품들을 읽고는 생각을 싹 바꿨다. 우리의 단편문학은 정말 '진보'하고 있다.

김연수 표 '문장'은 문장에 정신 팔려 책읽기를 잊을 만큼 미문(美文)이다. 누구는 "김연수 글은 잘 안 읽혀!"라고 불평하시는데, 당연한 말씀! 김연수의 문장은 그대로 시(詩)인데, 시를 속독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문장마다 가득한 시적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릴 수밖에. 공들인 문장을 읽을 땐 독자도 공을 들일 의무가 있다.

그런데! 내 상상 속 김연수는, 문장을 골백 번 가다듬는, 따라서 작품수가 적은 '은둔하는 장인형 작가'였는데, 의외로 작품수가 많은 편이라 놀랐다. 어쩌면 그냥 쓰면 이런 문장이 줄줄 나오는 지도 모른다. 으음, 그건 좀 반칙인데.

감상주의는 싫다

이제 싫은 부분을 말해보자.

첫 작품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은 솔직히 지루하고 짜증스럽다. 행동은 없고 생각만 있는 '옛날' 한국소설을 그대로 닮았다. 그 다음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는 화자의 위치가 재미있긴 하지만 지루하긴 마찬가지.

맨 처음 실린 작품이 이렇게 재미없는 건 문제다. 첫 작품이 <...농담>이 아니었다면, 만 부 정도는 더 팔리지 않았을까? 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분이 이 시시한 첫 작품을 읽고서도, 과연 이 책을 샀을까? 나라면 안 샀을 거다. 그 덕에 뒤에 실린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는 작품들을 즐길 기회를 놓치고 말았겠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특히 공 들인 작품 냄새가 난다. 어떤 말을 하려는 지는 대충 짐작가지만, 감응하긴 어렵다. 그건 아마 작가와 나의 '세대 차이' 때문인 듯. 작가는 나보다 10살 정도 윗세대인데, 그 세대의 감수성이란 게 내겐 간혹 촌스럽게 느껴진다. 내 어린 시절을 그 세대인 사촌형과 한 방에서 보낸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관찰자 입장에서 낱낱이 들여다봤으니까. (지금 막 다 읽은 작가의 수필집 <청춘의 문장들>의 독후감을 쓰게 된다면, 그때 이 얘기를 더 해보련다.)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은 익살스러운 문체가 재미있긴 한데, 이야기 자체는 별 재미가 없다. 꽤 매력적이고 뻔뻔男인 주인공의 활약상이 조금 더 펼쳐졌다면 재미있는 액션 시대극이 나왔을 거 같은데.

이 작품들이 싫은 이유는 '감상주의' 때문이다. 작가는 틈날 때마다 내면으로 침잠하려고 한다. 그리고 공감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내가 읽고픈 건 감정이 아닌 행동이다. 행동으로 감정을 미루어 짐작하는 재미를 즐기고 싶은 거다. 감정을 시시콜콜 나열하는 건 잔소리처럼 들린다. 잔소리는 재미없다.

예를 들어, 편지 형식인 <거짓된 마음의 역사>은, 감정의 묘사가 전혀 없지만 화자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진다. 반면, <...농담>이나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경우,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 붓지만 오히려 감정이입이 어렵다.

난 김연수 씨처럼 훌륭한 작가가 더욱 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기를 바라는데, 작가는 어느 선에서 스스로 담을 쌓는다. 나처럼 마음은 메마르고 머리는 돌대가리인 독자와는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그건 정말 아쉽다. 그럴 거 같진 않지만, 만약 이런 재능을 지닌 작가가 "선수끼리 돌려 있는" 소설을 쓴다면 난 정말 크게 실망할 거다.

‘나’는 누구인가

실험적 요소가 여럿 눈에 띄는데, 그중 '화자(話者) 알아맞추기'가 재밌다.

이야기는 다짜고짜 ‘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독자는 어리둥절. 초조한 마음으로 문장 속으로 몰입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독자는 그 나름의 ‘나’를 필사적으로 떠올린다. 드디어 ‘나’의 몽타주를 완성한 독자가 불안감을 떨치고 슬슬 이야기를 즐기는 순간! 작가는 독자의 상상을 배신하는 뜻밖의 ‘나’를 드러낸다. 때론 “뭐야!”하고 살짝 화도 나지만, 이런 사기는 너무나 즐겁다.

소설 속 ‘나’를 상상하다보면, 오히려 독자의 머릿속 구조가 드러난다. 이런저런 편견에 사로잡힌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작품마다 전면에 나선 ‘나’는,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저마다의 진실’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애초에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 ‘나’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에겐 나의 진실이, 당신에겐 당신의 진실이 있다. 진실/거짓의 구분이 흐트러지면, 문학의 중요한 역할인 ‘공감’의 폭이 확장된다. 덕분에 이 단편집의 재미는 한층 더 깊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권말에서 작가는 이 단편집이 독서의 결과라고 말한다. 다른 책을 읽고 난 뒤, 그 내용을 토양으로 자라난 이야기란 말씀. 그 책들의 목록은 밝히지 않았지만, 이 작품집의 패러디적 성격과 상호 텍스트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남원고사>는 그야말로 단적인 예.)

또, 작가와 화자를 분명히 구분한 점도 재미있다. 작가 자신이 아닌, 수많은 ‘나’의 존재가 이 단편집의 특징인데, 액자구조의 변형으로 보면 맞을 것 같다.

이 두 특징을 보면, 탈근대주의, 소위 포스트모던 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될 것 같다. 드러내진 않지만, 작가 스스로도 문학 이론에 해박한 것이 분명하고, 탈근대 문학에 호응하는 듯한 태도도 엿보인다.

그런데 권말 평론을 쓰신 문학평론가 김병익 씨는 이 작품의 탈근대성을 극구 부인한다. 그분은 이 작품집을 전통적 한국소설의 연장으로 보는데, 그건 <...농담>이나 <...설산>에 국한된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 외 작품들은 내가 보기엔 정말 새로운데, 전문가의 눈에는 아무래도 다른 듯. 뭐, 그것도 좋다! 사실 내게 정말 중요한 건 내 취향이다. 나는 평론가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니고, 다만 책 좋아하는 한가한 아저씨일 뿐이니까.

그리고

아무튼 난 김연수 작가의 (아직은 조금 의심이 남은) 팬이 됐고, 사랑하는 알라딘에서는 작가의 친필 서명이 담긴 신간 <밤은 노래한다>를 보내주신단다. 아아,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알고 보니 작가는 꽤나 활동적인 블로거다. 왠지 모를 섭섭한 기분. 남 몰래 연모하던 책방 아가씨, 알고 보니 애 딸린 유부녀. 뭐, 그런 기분.

링크 – THE ARCHIVIST Completed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8점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